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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주께 받은 사랑의 빚

본문 / 13: 8-10

 

 

1. 종교개혁

우리 교회에서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10월의 마지막 날인 1031일을 종교개혁기념일로 지킵니다. 15171031일에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당에 붙였는데 금년이 그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붙인 이 95개조의 반박문은 처음에 학술적인 토론을 해보고자 붙인 것입니다. 당시에 부패한 교회의 상징이었던 면죄부 판매와 고백성사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 주제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폭발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그 결과 교회의 권위, 교황권, 복종의 문제, 성례전, 구원의 교리 등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들을 다시 검토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이러한 개혁으로 인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되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가 목숨을 건 이러한 종교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루터가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이 저술한 한 책의 서문에 나는 수도사로서 흠 없이 생활하였지만 내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양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공로를 통하여 달래졌다고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죄인들을 벌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미워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이 의에 의하여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바 그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여기서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서 성서 전체의 전혀 다른 면모가 보였다.”고 하는 내용의 글을 써 놓았습니다. 한마디로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한 것입니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수도사로서 금욕적이고 경건하게 살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서는 거듭나서 열린 문으로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성경 전체를 새로운 면모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성서주해의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이러한 루터에 주장에 대하여서 그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적인 선행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하여 이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은혜의 선물로 받은 그 사랑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어떠한 회유와 협박도 통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랑에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실상

오늘 본문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고 합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의 빚은 져도 다른 빚들은 지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빚을 지게 되면 얼마나 부담이 되는 것입니까? 잠언 22장에 보면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22:7)고 말씀합니다.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다 갚지 못하는 한 채주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빚을 지고 살면 안 됩니다. 그 빚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아버리면 종이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질 수 밖에 없고, 성도라면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랑의 빚을 갚아 낼 수 있다면, 사랑도 갚아버린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요 거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갚자고 나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 갚지는 못해도 만분의 일이라도 갚자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갚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받았기에 빚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의 빚은 부담이 아니라 감사인 것입니다. 이 사랑에 빚에 대하여 로마서 1장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4-17)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빚진 자입니까? 율법의 완성에서 나오는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가 없기에 주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이기에 오늘도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종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오늘 본문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3:9)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러한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였던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지켰다고 하는 그 율법이 자기 의가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 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라는 질문으로 시작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10:26)고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그때 그 율법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10:27)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10:28)고 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자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라며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강도 만나서 다 죽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못 본체 지나가고 사마리아인이 그를 돌보았다고 하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를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란 우리 주변에 소외되고 가난하게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강도 만난자의 이웃만 되어주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강도는 누구며 그 강도에게 피해를 당한 자가 누구인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강도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지는 사람을 강도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2장 그리고 누가복음 20장에는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때리고 쫓아버린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마저 죽이고 그 기업을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포도원 품꾼들이 다름 아닌 율법을 잘 지킨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임당한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만이 강도가 아닙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살아갑니다. 땅도 하늘도 우리의 몸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다 받아쓰고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사니 전부 강도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22:52)고 합니다. 예수님을 강도 잡듯이 잡으려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주인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자기들의 나라, 즉 자신의 것을 자기 것으로 지켜 내려고 하는 그들이 바로 다 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도 만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강도 만난 이웃인 예수님을 내 몸처럼 사랑하였습니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은 결국 참된 이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며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아니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 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십자가를 내 미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밀쳐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자비의 대상이 된 자들은 자신이 강도임을 압니다. 내가 강도 만난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강도인데 이런 강도를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한편 강도처럼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자비를 받은 자는, 이런 자비를 베푸신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16:22)라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따릅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영생의 문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완성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의 참 이웃으로 오신 분을 우리는 강도가 되어 그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바르게 선행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 앞에서 드디어 죄가 무엇인지 속속들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자신은 사랑이 없는데 율법을 완성하신 그 사랑을 받고나니 사랑에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3. 우리가 받은 사랑

그럼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5-8)고 합니다.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 죄인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고 큰지를 알게 될 수록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거저 주시는 은혜가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4-5)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인 삯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로 받았기에 우리가 빚으로 여긴다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받은 사랑은 갚을 수 없는 빚이지만 그것이 율법적인 채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자꾸만 자기 편리한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대답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께서 식사하러 가셨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죄 많은 여인이 만지도록 그냥 두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이신 사랑을 하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행위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7:41-42)고 질문 하십니다. 그러나 시몬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7:43)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인 시몬을 책망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눈물로 발을 씻기고, 너는 입도 맞추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발에 입 맞추고, 너는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지만 저 여인은 향유로 부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7:47)고 하십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그렇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기에 그 은혜가 감사해서 나오는 증상인 것이고, 반대로 바리새인인 시몬이 그 여인과 같이 행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사함 받은 죄가 적다고 여겨 적게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의 용서와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 율법으로 또 말씀으로 이웃을 정죄는 할지언정 사랑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된 사람은, 그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받았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런 사랑, 율법의 완성인 사랑,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이 사랑의 빚이 있습니까? 그 사랑을 알고 누리는 자만이 오늘 우리 주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과 그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그런 사랑을 하고자 자랑이 있을 수 없고 또 그런 사랑을 못하는 자를 정죄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나 같은 자를 하나님을 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것임을 알아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이런 은혜의 통치와 다스림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말씀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말씀합니까?

3.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또 우리는 그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왜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가 되는 것입니까?

6. 주를 사랑하는 아니하는 자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빚진 자가 되었다고 합니까?

8. 우리가 받은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라고 합니까?

9. 리가 받은 사랑을 갚지 않아도 되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한 오늘 말씀의 답은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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