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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받으셨으니 서로 받으라

본문 / 14: 1- 6

 

 

 

1. 세상 시각의 평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11월이 되면 시험 광풍이 붑니다. 대학 수능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성당 등 모든 종교기관마다 학부모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지난 12년 동안 쌓은 실력을 하루에 치러지는 시험으로 평가 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들 하면서도 여전히 해마다 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학수능이란 말 그대로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 자를 가려내기 위하여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류대학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한때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시험 쳐서 들어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시험전형이 되었을 때에 흔히 일류 고등학교라고 자부했던 어떤 학교는 몇 년도에 입학했느냐를 따지면서 구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험 봐서 들러온 기수냐 아니면 무시험전형으로 들어온 기수냐를 따져서 시험으로 들어온 기수까지는 실력 있는 자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직업, 입는 옷, 아파트 평수, 타고 다니는 차종에 따라 차별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과 다르다는 교회는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런데 교회조차도 세상과 거반 다르지 않습니다. 너희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느냐? 예배당 건물은 자기 땅에 지은 것이냐 아니면 상가 건물이야? 교회 재정 상태는 어떠냐? 하는 식으로 교회를 평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일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심으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사람의 수나 건물이나 재정과 상관없이 주님 보시기에는 완전한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기에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나음을 자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그곳이 교회라 이름한 곳에 모였다 할지라도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있어왔습니다. 누가 더 잘하는가? 또는 누가 더 나은 믿음인가? 하는 모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로마의 교회도 별 다를 바가 없었고,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교회는 어떠한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2. 용납(먹는 문제)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14:1-2)고 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누구입니까? 고기를 먹지 못하고 채소를 먹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믿음이 강한 자는 누구입니까?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를 구분하여 차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은 믿음이 연약하거나 강하거나 간에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에 의하면 정결한 음식이 있고 부정한 음식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런 법을 늘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지금까지 지켜왔던 그런 법을 이제는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법들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이제 교회에서는 누가 무슨 법을 지키느냐 또는 지키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먹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믿음이 연약한 자란 어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에 따라 자기의 믿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자라면 그러한 조건을 보고 받으신 것이 아닌데 아직도 무슨 음식의 규례를 지켜야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런 규례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그 규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자유라고 하면서 너희 마음대로 살아도 되느냐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 규례도 지키고 날과 절기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다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14:3)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낫다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면 그 사람의 먹고 또는 먹지 않고는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으로 용납되어진 것이 아님을 알고 또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15장에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기 피로 의롭게 하셔서 우리를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의로워져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 아는 것처럼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사람들을 복음서에서 보면 세리와 창기 그리고 죄인이라 취급 받던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이 사람들끼리 모여서 과연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세리가 몰래 세금 떼먹은 것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창기가 자기가 몸을 팔아 성 매매한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그런 자인지 아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의 행위를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너는 주일 1부 예배 때만 오느냐, 나는 오후에도 오고, 수요기도회도 온다고 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를 업신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주의 은혜로 다 함께 용서 받은 자로서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14:4)고 말씀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그 주인에게 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되면 자기가 자꾸 교정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가 그런 짓을 잘 합니다. 그래서 자꾸 성경이 말씀하지도 않는 법을 만들어내어서 사람들을 그 법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인이 법으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받으셨는데 종이 감히 주인의 의중을 무시하고 법을 만들어 믿음이 약하고 강하고를 판단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증거 하는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일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1-21)고 합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을 보고는 그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도 마치지 않은 채 물러간 것입니다. 바나바도 여기에 미혹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데 베드로가 그런 외식을 하기에 책망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아니하는 문제들, 즉 무얼 해도 되고 또는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로 싸우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싸움은 항상 사소한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쳐두고 사소한 것들로 판단하고 편 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 문제에 마음이 걸리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 것이니 믿음이 강한 자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분명하게 믿고 참으로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율법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아니 먹고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는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자유하면서 우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먹을 수 있지만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는 그것으로 시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 할 수 있는 자가 자신의 그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약한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받으셨는데 우리가 반대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하여야 할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도 못하느냐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한다고 그것 또한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주님에게 용납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선교초기에 선교사들이 와서 보니 술과 담배가 심각한 문제였기에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의 전통이나 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구원받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술과 담배가 인이 박혀서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도 술 담배를 끊지 못했느냐고 면박을 주며 판단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호식품에 인박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술 담배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때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용납하신 주님이신데 그것을 우리가 반대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용서받은 자로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납할 것입니다.

 

 

3. 용납(날짜의 문제)

다시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14:5)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먹는 문제였다면 이제는 날짜의 문제입니다. 어떤 날짜를 중요하게 여기느냐 마느냐는 것입니다. 특정한 날짜를 지켜야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안식교인 것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일요일을 중요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날들을 다 중요하게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자기의 마음에 확정하라고 합니다. 자기의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날짜를 지키고 아니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시킨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날짜를 더 낫게 여기거나 모든 날을 같게 여기거나 간에 주님을 위하여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리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한다는 것이 마음에 확정한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며,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준은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14:6)고 말씀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먹지 아니하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서 받으신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자라면 나와 다르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하나이나 지체가 여러 가지입니다. 강하고 약한 지체들이 다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와 기호가 맞는 사람만 사귀겠다는 것은 취미단체입니다. 나도 주님의 피로 용납되고 당신도 주님의 피로 용납되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 문화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취미와 기호가 달라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드러나는 아름다운 증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주님의 피로만 받아들여지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의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잘났는가를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용납함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런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천국 백성이라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 가운데서 그 하늘의 맛을 항상 맛보아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과 거반 다르지 않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먹는 문제를 가지고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4. 우리가 서로를 용납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그런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5. 우리가 흔히 교회 가운데서 범하기 쉬운 잘못은 무엇입니까?

6.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사건은 무엇이며 또 책망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7. 교회 가운데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문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각각 우리 마음에 확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9.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교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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