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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도의 영접과 주 안에서의 문안

본문 / 16: 1-16

 

 

 

1. 사귐

연말연시가 되거나 명절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문안인사를 합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부모나 스승 그리고 직장의 상사나 동료 후배들에게도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가 공평하지는 않습니다. 연하장이나 문자 메시지로 때우는 문안인사가 있는가 하면, 선물을 돌리거나 또는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똑같은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도 이러한 차별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두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와 사귐을 통하여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인간관계에서는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바울 사도와 사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마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바울 사도와 사귐이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라고 합니다(고린도후서11:23-28도 참조). 바울사도가 세상에서 사는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런 사람하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코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이런 사람이 내게 가까이 올까봐, 자신과 사귀자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무서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사도는 누구와의 사귐이 있기에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귈 자를 가려서 잘 사귀라는 이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친구라고 데리고 왔는데 세상의 구경거리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를 친구로 데리고 온다면 부모 된 입장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도시락 싸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이러한 모습을 알고 또 보고서도 우리가 바울과 사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무언가 외부에서 대단한 능력이 작동한 것입니다. 제 정신이라면 이 세상에서 바울 사도가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계속적인 사귐을 원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바울사도와 처음에 사귐이 있다가 그를 떠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딤후1:15)고 합니다. 또 디모데후서 4장에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버리지 않고 바울과 함께 한 자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2. 문안하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창조되어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세상의 방식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영접하며 교제하고 문안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과 취미와 기호를 따라 모임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란 일체 그런 내용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자기 공로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만 모여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라면 더 이상의 인간적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16:1-2)라고 합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자매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일꾼이란 집사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뵈뵈는 이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뵈뵈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여집사로 추천하면서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하며,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겐그레아는 고린도 지방의 도시이며, 그곳 출신인 뵈뵈를 추천하는 곳은 로마 교회입니다. 한마디로 지방 출신을 대도시 교회에 추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가지고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를 방문하는 뵈뵈를 로마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가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혹 그녀를 배타적으로 여기거나 그들의 우월감으로 천시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로마 교회를 방문하는 뵈뵈를 로마 교회가 정중하게 영접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뵈뵈를 그렇게 맞이하여야 하는 까닭에 대해서도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바울사도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를 알면서도 바울과 복음전하는 자들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선교 사역에 경제적 도움을 준 뵈뵈의 따뜻한 배려에 관해서 그녀를 보호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 주요, 한 성령이요, 한 몸임을 증거 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신분과 지위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선거권도 없고, 증인 채택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은 기도할 때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최초로 증거 한 사람이 바로 여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의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16:3-5)고 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부부인데 부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자가 헌신을 하고 싶어도 아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내가 더 헌신적이니 남편이 뒤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바울을 향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바울사도의 무엇을 보고서 바울사도 대신에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였겠습니까? 바울과 함께 동역하면서 바울의 항상 당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들의 목숨을 대신 내어놓을 정도로 함께 한 것이겠습니까?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았기에 그리고 그 복음이 자신들의 목숨보다 귀함을 알았기에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어 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울을 떠난 이들과는 대조적인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자가 있는 반면 반대로 복음을 사랑하여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역에 대하여서 이방인의 교회들도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가정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저는 부끄럽고 또 부러울 뿐입니다. 과연 복음을 말하면서 이런 바울의 모습이나 바울의 동역자의 모습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16장 안에는 무려 26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이름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문안하라는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왜 이들에게 문안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모두가 한 성령을 마시고, 한 주를 섬기고,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복음의 동역 자가 되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육신의 혈통이나 이해관계에 있는 자들보다 더 귀한 관계이기에 문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이런 문안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 이름들에 붙는 그 수고가 우리에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 다시 오늘 본문 5절부터 보면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16:5-15)고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이름을 간략하게 보면 에배네도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마리아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많이 수고하였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바울의 친척인데 먼저 그리스도를 알았고 감옥에 함께 갇혔고 사도들에게 유명이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라고 합니다. 암블리아란 로마의 종들이나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르바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라고 합니다. 아리스다불로의 권속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바울의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단지 자신의 친척이라고 문안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됨을 인하여 하는 것입니다.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속을 그 집안의 노예들로 보기도 합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또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랑하는 버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만큼 바울사도가 도움을 입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순그리도, 불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와 그 자매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이미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주인과 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한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문안이 있습니까? 이런 사귐과 교제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만든 벽은 없습니까? 그래서 혹 끼리 끼리 어울리면서 벽을 만들고 자기들만의 세상은 만들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친한 사람끼리만 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 문안의 인사 앞에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신앙고백으로 매주 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어떤 성도의 교통이 나오고 있습니까? 거저 사람과 부딪히기 싫으니 예배만 마치면 도망가기 바쁘십니까? 그러나 정작 예배 가운데 성도의 영접과 주 안에서의 문안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제부터 성도의 교제와 문안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접과 문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가를 말하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서 옳다함 얻음은 보혈의 능력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소망으로 살겠는가 하는 위로와 격려가 서로 서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제 속에서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러한 교제 안에서는 시기와 경쟁이 나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제와 나눔과 사귐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3. 거룩한 입맞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보면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16)고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인사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거룩한 문안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배 후에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무엇을 입었는지, 무슨 머리를 하였는지 하는 이야기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이 주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얻었다면, 그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우리의 평생에, 오고 오는 세대에도 다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바다를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사랑이 성도의 영접과 문안 속에서 더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읽으면 많은 이름을 오르내렸지만 여기 기록 된 이름이 우리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귐을 가지고, 우리가 이런 교제를 하며, 우리가 이런 문안을 하며 거룩한 입맞춤의 인사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 된 이들과 우리는 같은 주를 섬기며, 같은 말씀을 들으며, 같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나눈다면 그들이 나누었던 그리스도를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또 그것이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여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주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사귐과 나눔과 교제가 충만한 아름답고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이 세상에서 사귐과 인사에도 차별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리가 바울과의 사귐을 멀리하는 까닭은 무엇이며, 바울은 누구와의 사귐이 있다고 합니까?

3. 세상의 모임과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임은 어떻게 다르며 그 증상은 무엇입니까?

4. 바울이 로마 교회에 자매 뵈뵈를 추천하며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위하여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울 사도와 사귀다 바울을 떠난 자와 마지막까지 바울과 사귀는 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7. 리가 바울 사도의 이 문안 인사를 대하면서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성도의 영접과 주안에서의 문안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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