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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

본문 / 6: 9-13

 

 

1. 주기도문의 의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물론 입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알고 나면 참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기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유대인들의 기도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21절부터 보면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1-22)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제와 기도도 모두 잘못되어 있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제나 기도는 모두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기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함으로써 이방인과 같은 중언부언의 기도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 된 천국 백성의 기도와 옛 사람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기도인가를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기도는 무너뜨리시고 그 대신 주님의 기도를 세우심으로써, 주님의 기도에 동의하고 그 기도에 일치된 삶이되기를 소원하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천국 백성임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기도문은 교회에 나오면 외워야 하는 교인의 증표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심으로 심령이 새롭게 된 신자가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어떤 내용이고 어떤 의미의 기도인가를 알게 되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기도가 아니었음이 발각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기도를 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중요성을 열심히 기도하는 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무엇인가를 모른 채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기도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를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생각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답답한 것은 그러한 기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줄 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함께 한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늘에 계신

그러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를 하나하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이 기도를 혹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만 계시고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분명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장소에 계신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초월적이고 거룩의 의미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분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하나님을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한 분으로 알라는 의미로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이 거룩한 분이라면 기도하는 신자는 어떤 존재인 것입니까? 이것부터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면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께 감히 나올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당연히 하나님은 응답하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과 가인의 제사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4:6)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가인의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가인은 당연히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으셔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제사하는 자들은 죄인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 자신의 존재를 안다면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아니한다고 해도 사실 할 말이 없는 자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가인처럼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셔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아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면서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지 못하고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8:30)라는 기도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즉 성소(성전)를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는 부정한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성소의 언약궤에 제물의 피를 뿌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교회를 향해 또는 교회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에 와서 요한복음 2장에 보면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9-21)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성결케 하는 내용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늘날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 말은 지금 우리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전이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설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거룩한 분이기에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은 위해 하나님계서 마련하신 것이 성소였던 것입니다. 즉 성소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즉 성소에서의 제물의 피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했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를 보시고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성소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성전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정성껏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주술적인 신앙입니다. 인간의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하늘에 계신라는 말을 수없이 하였으면서도 정작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이 첫마디의 기도부터 인간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다는 것은 크신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연히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아버지

두 번째로 등장하는 말씀이 아버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말에서 사랑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식을 지키시고 돌보시고 도와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을 도우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식으로써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은 아십니까? 우리의 아버지께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뜻을 가지시고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시고, 무엇을 도우시고 무엇으로부터 지키시는가를 알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얘기하면서 항상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큰 오류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얘기하기 때문에 서로의 하나님이 달라서 충돌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일치하느냐 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늘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 땅에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알려주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가 아닌 내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7:21, 16:17 ). 이처럼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 유일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파악되는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20:17)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만나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힘과는 무관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하나님은 이 일을 독생자이신 예수심의 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예수님의 피의 의를 의지하면서 예수님의 공로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그를 가족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나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셔서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50)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자기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른다면 무엇보다 아버지 앞에서 나의 뜻은 존재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4. 거룩히 여김 받을 이름

사람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삽니다. 하나님께 나와서도 자신의 이름이 영광받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 받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자신의 이름은 포기되고 무너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오직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데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거룩히 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자기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한 평생을 살아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은 할 수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고 목회를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도 모두 사실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비록 명목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목회성공이나 교회 부흥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을 감추기 위한 위장일 뿐입니다. 이처럼 자기 이름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됨을 위해 기도하고, 신자인 내가 잘돼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잘되는 것과 아버지의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이름을 아들로 말미암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 첫마디부터 우리의 기도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옛 사람의 기도와 새 사람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가는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기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 없는 의로운 자로 여김 받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죽어야 할 내 이름 위에 덮어져 있는 사랑과 자비하심의 아버지의 이름을 바라보면서 그 이름을 높이는 자로 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가족임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거룩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크게 착각했던 내용과 그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솔로몬 왕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줄 알면서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까닭과 오늘날 그 의미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6.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주술적인 신앙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범하는 가장 큰 오류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마땅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8. 인간이 기도하는 목적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가장 큰 다름은 무엇입니까?

9. 다시 한 번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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