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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본문 / 6: 9-13

 

 

1. 세상을 보는 시각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분명 달라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신앙은 결국 세상의 것을 이방인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세상의 복을 받아서 잘 살고 싶은 사람들로만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말씀하는 성경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또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의 실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또한 믿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라고 하는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그리고 죄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다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 또한 자연히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오직 돈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에 목적을 두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설사 돈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에 자신의 모든 가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이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볼 때는 그러한 일은 칭송받을만한 가치관이고 생각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남을 돕는 일을 하며 살았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영원한 저주에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는 이미 죽은 자일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자로 이 세상에 머물렀던 것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들을 저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게 된 신자라면 그에게 가장 존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저주에 갇힌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망과 멸망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자비이며 인자하심인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엄청난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용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이 힘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돈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저주를 이기는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간의 도덕과 윤리도 힘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착하게 살고, 남을 돕는 봉사를 하며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그러한 저주에서 구원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신자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돈이 없어 겪는 고통과 곤란은 잠시지만 하나님의 용서로 인한 평안과 안식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할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2. 나를 살게 하는 것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하는 신자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은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어도 밥 먹고는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당장 죽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시험입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것처럼 지금 당장 내 육신에 유익이 되는 것을 따르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을 굳게 붙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존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라는 생명의 관계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는 것은 나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사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생존을 사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자연히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을 부르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생존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 육신의 생존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이 땅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마귀는 육신의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의 육신은 이미 죽음에 붙들려 있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며 도리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 먹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가 되어 창세기 3장에 보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는 말씀의 권능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존해 있는 것은 다만 죽음이 몇 년 혹은 몇 십 년 유보되어 있는 것일 뿐이지 때가 되면 우리도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월이 화살같이 빠르다고 말합니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20년전, 30년전도 바로 엊그제 같이 느껴진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100년을 살다 죽는다고 해도 그 세월은 결코 긴 것이 아닙니다. 어제 세상에 온 것 같은데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겪는 고통은 잠깐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안락과 영광도 잠간입니다. 지나고 나면 모두가 순간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을 그같은 순간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돈은 순간의 기쁨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영원한 기쁨으로 계속됩니다. 신자는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를 소원해야만 합니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세상에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기를 소원해야만 합니다.

 

 

3. 주님의 나라, 권세, 영광

신자가 자신을 살게 하는 것, 즉 생명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가 원하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자신의 소망을 담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으로 변화되고 또 그러한 세상에서 자신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6:13 )라는 기도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그동안의 자신들이 받았던 핍박과 설움에서 해방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 메시아는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능력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가장 큰 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나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영광을 누리는 이스라엘이 되는 그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스라엘이 원하고 기다리는 그러한 나라가 없었으며, 그들이 소망하던 권세와 영광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 아들을 이 세상에 메시아로 보내셨습니다. 아들이 오심으로써 세상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 세상이 추구하고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풍성하게 내려주고,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로 큰소리치며 살게 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힘이 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권세도 세상의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죄 있는 몸으로 오셔서 죽음의 권세에 갇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권세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 나라로 자기 백성을 죄 없는 자로 초대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아니 요즘은 말씀을 좀 안다는 사람은 그리스도도 드러나고 또한 나도 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빌리보서 1장에 보면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0-21)고 합니다. 성경은 내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기만을 말씀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0장에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성공하고 우리가 인정받는 그러한 나라만을 생각합니다. 권세 또한 예수님이 권세를 가지시고 사망에 갇힌 우리를 구출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 또한 세상에서 권세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권세 있는 분이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권세만 의지하는 것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권세가 나를 권세 있는 자로 세워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 없는 자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이 영광이 됨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세상에서 영광된 존재가 되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신자의 승리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영광을 멸시합니다. 그러한 하늘에 속한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6:13 )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모두 버리고 예수님이 가져오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미래를 바라보는 기도가 아니라 지금 현재를 보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며,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권세가 역시 우리에게 있으며,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영광에 들어가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보게 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진심으로 하는 신자라면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세상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 같은 가치관과 시각을 가지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단지 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고 기도하는 것은 생명의 실재를 믿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몸을 입고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는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되심을 믿는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주님의 생명의 권세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누리고 있는 영광이고 복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6:13 )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이 기도에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눈에 보이는 나라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영원한 심판에 들어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시험에 들지 않고 참된 생명이 되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승리인 것입니다. 이 승리를 이미도 주께서 허락하셨으니 하나님을 바르게 앎으로 말미암아 이미도 허락된바 그 은혜의 승리를 누리며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신자가 불신자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신자가 기쁨으로 여기는 것과 불신자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3.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시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데 있어 바르게 알아야할 내용은 무엇이며 왜 중요한 것입니까?

5. 메시아를 향한 이스라엘의 기대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다릅니까?

6. 오늘날도 주를 믿는 우리의 기대와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세상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싫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기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 엇입니까?

9.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승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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