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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돌아 온 사마리아 나병환자

본문 / 17:11-19

 

1. 감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삽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 중에는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당장 숨을 쉬게 해주는 공기가 그러하고, 물이 그러하고, 햇빛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결코 자력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자가 숨을 쉬는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이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기에 은혜라는 생각이 특별히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와 공기처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를 일반적인 은혜라고 구분하면서 그 가치를 하락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원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햇빛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감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하는 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편 136편에 보면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7-9)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이 시편의 내용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감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숨 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영원하십니다라는 고백이 참된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감사는 다만 형식적인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나병이 나은 한 사람의 감사가 단지 육신의 나음을 입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한 명의 사마리아 나병환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며 한 촌에 들어가셨을 때 나병환자 열 명이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7:13)라고 외치는 것으로 시작 됩니다.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7:14)고 말씀하시고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음을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사례하는데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7:19)는 말씀을 하십니다이 내용에서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왜 나병환자들에게 굳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들을 깨끗케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굳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 열 명 가운데 돌아와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나병환자 열 명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취급하고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포함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곤란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기에 제사장에게 갈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에서 신분의 차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다른 유대인 나병환자와 동일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만 돌아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의 병 나음을 당연한 은혜로 생각했을 수 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당연한 은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인자하심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똑같이 나음을 받았는데 왜 한 사람만 예수님에게 돌아오고, 나머지 아홉은 제 갈 길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만 합니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온 것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즉 돌아오지 않은 아홉은 예수님을 병 고치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만 여겼지만, 돌아온 그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해 버린 생각이고, 왜 굳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간과해 버린 생각일 수 있습니다. 병 고침 받은 능력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게 되었다면,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은 병 고침 받는 경험으로도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즉 성령과 무관하게 기적의 경험만으로도 예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을 아는데 있어서 병 고침 받는 기적은 참으로 중요한 체험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병 고침 받는 기적이 없는 것보다는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일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말도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같이 고침 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변환자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까? 머리가 나빠서 이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만약에 아홉 명의 사람들이 돌아 오진 않은 것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서라면 결국 돌아 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나병이 나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한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와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5:7)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귀신도 분명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일컫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귀신도 갖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식이 우리를 예수님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기 보다는 나 같은 자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당신의 인자와 사랑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더욱 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처절한 고난으로 몰아넣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그 인자와 사랑을 사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도무지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없고 은혜를 입을 자격도 없고 그러한 존재도 못되는 나 같은 자에게 인자와 자비하심이 주어져서 저주에서 건짐 받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의 분량은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 보면 바울 사도도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7-19)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다 안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단지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상적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순간적인 마음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나의 존재성을 보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멋진 감동으로 마치 자신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 있는 것 같은 착각만을 갖게 할 뿐입니다. 신자는 말씀 앞에서 철저히 죽어져야만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라는 제목의 찬송처럼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구원해 주셨는지요? 너무나 크고 높으신 은혜에 할 말이 없습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에게 돌아간 것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있음과 없음의 구별은 바로 이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나병을 고침 받는 그러한 은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돌아가서 예물을 바치면서 자기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를 보게 된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고, 예수님에게 돌아와 사례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같은 해와 같은 달을 보고 살아가고 또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며 살아가면서 비록 자신의 세상 일이 자신의 원함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인자하심에는 차별이 없음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 만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인자하심은 외면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감사목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자신의 병 나음만 생각할 뿐 평생 나병환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3. 믿음이 하는 일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46-52)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앞에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말이 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36)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맹인 바디매오에게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51)라고 물으십니다. 똑같은 물음에 대해 제자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라고 답을 하였고, 맹인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0:51)라고 말을 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물음에 대해 원하는 것이 달랐다는 것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맹인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제자들은 눈이 정상인 사람들이기에 맹인이 바디매오와는 다른 원함을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보고 또는 보지 못하는 것을 단지 시각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그러한 생각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보고 또는 보지 못함의 의미를 시각적인 것으로만 따지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3:26)고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바리새인을 향해 소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보고,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시각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제자들이 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맹인인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하는 것은 각기 자신의 처지에서 당연한 반응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10:38)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소경과 다를 바 없는 상태임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를 자신들에게 영광이 되는 자리로만 생각했지 그 자리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에게 주어지도록 예비된 자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의 영광 또한 주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직 자신들이 누릴 영광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보지 못하는 맹인과 다를 바 없는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0:52)는 말씀은 중요한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보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육체적인 시각으로 설명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한 믿음을 통해 우리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상을 알고 보게 될 때 우리는 바른 무엇을 구하는 자가 아닌 바디매오처럼 보기를 원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바디매오가 보게 된 것처럼 진정으로 주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과 그 생명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입을 가진 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악한 존재일 뿐이고 무엇 하나 받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저주가 합당한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감사거리를 챙기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를 위한 길로 가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 자신의 어떠함을 보게 하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누리며 사는 공기나 햇볕 같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같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여도 그 차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3.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믿음과 지식의 차이는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4. 를 믿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5.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상 적으로 보지 말라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고침 받은 나병환자 중에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주께 돌아와 사례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주님이 던지 똑같은 질문에 다른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을 통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9.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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