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9,431
오늘 : 265
어제 : 410

페이지뷰

전체 : 78,776,585
오늘 : 1,074
어제 : 1,581
조회 수 17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이 세상의 끝과 그 징조

본문 /  21:10-19  

 

1. 종말과 신앙

오늘날의 교회의 설교를 보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세상의 복과 윤리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것은 신앙의 의미를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편히 사는 현실적인 삶에 두거나 또는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여 좀 더 지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종말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하나님은 지금의 세상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끝나는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그 때가 바로 세상의 마지막임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 후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대해 집중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의미와 목적을 이 세상의 복에 두고 있지만 종말이 실제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자신들이 복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윤리적인 삶의 실천 또한 종말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종말과 함께 완성될 영원한 생명의 나라는 세상의 복이나 윤리와는 절대로 무관하기 때문입니다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하나님의 생명의 나라는 윤리적 실천과는 무관하며 다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만 들어감을 믿는 것입니다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며의로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믿음으로 존재한다면 세상의 복이나 윤리적인 실천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그렇다고 믿는 자들이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믿는 자들이 좋은 인격의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며 살았다면 분명 세상 적으로는 잘 살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마치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할 신앙이라고 착각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의 설교가 세상의 복과 윤리의 틀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실 우리는 종말보다는 지금의 현실에 더 집중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종말과 함께 완성의 세계로 다가올 생명의 나라보다는 지금 내가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의 현실로 실감하며 세상에서의 나의 존재에 대해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처럼 신자의 관심이 지금의 현실로만 집중된다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도 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이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고그 징조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징조에 대하여 둔한 상태이기 때문에 징조를 보면서도 종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이런 점에서 보면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은 미래를 대비하는 보편적인 삶을 포기하고 오늘을 종말로 바라보는 신앙일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과부의 헌금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대비하며 또 내일 일을 염두에 두고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미래를 대비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삶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종말을 자기 인생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밀쳐놓게 됩니다그 전까지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또 하고 싶은 것들로만 가득한 인생을 살아갑니다남들보다 좀 더 멋있는 인생을 누리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한 것입니다이러한 인생들이 이런 열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항상 자기 열망이 성취되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고언젠가는 인생의 끝에 도달할 것인데 그때 하나님의 환영을 받으며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천국에도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결코 무너지는 곳으로 보이지 않습니다그런데 이 시간 주의 말씀 앞에 선 우리는 어떻습니까과연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무너질 곳으로 보이십니까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합니다이들은 성전을 무너질 곳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이들 눈에는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성전으로만 보였습니다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성전으로 보였을 뿐입니다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세상을 바라보며 설계합니다세상에 어울리고 걸 맞는 삶을 향한 열망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부릅니다그 속에 과연 세상의 마지막 때가 기억되고 있겠습니까그런 자의 속은 오로지 현실의 삶이 자기 소원대로 이뤄지기를 원하는 헛된 희망으로만 가득할 뿐입니다이들이 신앙이라는 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라 자기 희망사항이 조금이라도 이뤄지는 것입니다결국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희망이 현실화 되지 않고 헛된 꿈으로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희망의 현실화를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믿음을 붙들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종말을 품은 세상에서의 삶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10.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21:10-11)고 말씀합니다유대인들은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메시아를 기다렸고메시아가 옴으로써 이뤄질 그들만의 세상을 꿈꿨습니다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중심이 된 영광의 세상이 세워질 것이고그 세상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고 계속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이것이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고 의미며 목표였던 것입니다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성전을 희망으로 삼았던 그들의 미래에 찬물을 끼얹습니다전쟁과 큰 지진 그리고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무서운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오히려 12절에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21:12)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가야 할 신앙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우리들은 신앙으로 어떤 유익을 얻고 싶어 합니까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신앙이 우리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기를 원합니까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소원이 아주 일부분이라도 성취되기를 원합니까우리는 결코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합니다포기하기는커녕 단 한순간도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그래서 신앙도 내가 원하는 유익으로 다가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이러한 신앙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없습니다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난의 길로 가고 계십니다그 내용을 듣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은 우리의 신앙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습니다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은 고난 주간과 고난 주일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영화 같은 것으로 잠시 감상적인 고난에 빠져드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결론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가짜입니다헌금을 하고 무엇을 해도 진짜처럼 모방하려는 가짜일 뿐입니다이사야서 46장에 보면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46:10)고 말합니다여기 ‘시초’란 세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그런데 시초부터 종말을 알렸다면 세상의 시작즉 세상의 창조에 이미 종말이 담겨 있다는 뜻이 됩니다이 종말이 드러난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세상의 종말을 알리신 것입니다즉 세상은 이미 종말을 품고 시작이 된 것입니다따라서 세상에서 종말을 보지 못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세상에서 종말을 보게 되면 신앙은 종말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모든 것을 종말을 배경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됩니다이처럼 종말을 배경으로 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또한 내가 꿈꾸는 미래의 삶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됩니다삶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누구도 삶을 자신이 선택하여 살 수 없습니다병원이 가면 많은 환자가 있습니다가벼운 병에 걸린 환자가 있는 반면에 중한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는 환자도 있습니다하지만 병의 경중과 상관없이 누구도 스스로 병을 선택한 사람은 없습니다병이 찾아왔을 뿐이고 병에 이끌려 병원에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인생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이 선택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21:16-17)라고 말씀합니다우리는 이러한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부모와 친척과 벗으로 인해 박해자에게로 넘김 받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삶을 누가 원하겠습니까모든 사람에게 미움 받는 신앙을 누가 원하겠습니까우리가 원하는 것은 ‘잘한다’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삶입니다내 이름이 높임 받는 것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은 미움 받고 죽임을 받는 것을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너희’에 해당된 사람들이 가야 할 삶의 길로 말씀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종교와는 다른 신앙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한 징조가 세상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세상 역사는 끝을 보여주는 징조로 가득합니다그런데도 징조를 징조로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꿈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입니다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원하게 하는 삶의 노선으로 바꿔 놓기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신자가 두려워 할 것은 사실 없는 것입니다그런데도 늘 염려와 두려움에 붙들려 있는 것은 자신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고 무너지며 전혀 원하지 않은 삶에 부딪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혹시 신앙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까신앙에서 우리가 기대한 유익을 못한 것으로 인해 실망한 것은 없습니까실망하셨다면 그것은 신앙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약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바라보는 신앙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그래도 실망했을까요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는 신앙이었다면 어떤 삶의 현실에 있다 해도 실망하는 것은 없습니다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불교힌두교 등이 있으며 무속신앙도 있습니다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자기를 위한 종교라는 것입니다신은 달라도 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자기를 위한 자기 사랑이 바탕이 되어 신을 찾는 것입니다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만들어 지고 시작된 종교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따라서 기독교가 진심으로 기존의 종교와는 다른 참된 종교임을 주장한다면 공통적인 종교의 길과는 다른 길에 있어야만 합니다세상의 끝을 보면서 그 끝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길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크게 감동이 되고 붙들려서 그리스도로 인해서라면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 길로 가야 합니다그럼에도 두려움이 없이 인내하며 생명의 그 나라만을 소망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의 신앙이며 우리가 이끌림 받아야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약속을 마음에 담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생명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생명의 약속 외에 또 다른 약속은 없습니다영원한 생명에 견줄만한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약속이 있을리 만무한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라면 그 안에는 오직 생명의 약속만이 굳건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그래야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인내하는 것입니다신앙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가꾸어 가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그렇다고 세상을 향한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한 존재이고 이루어야 할 소원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이것이 우리의 참된 현실이 된다면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이루심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이러한 신앙에는 성공과 실패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내가 잘해서 신앙의 성공을 이루고그 성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루심이 우리의 의가 되고 상급이 되고 면류관이 되는 완성과 충만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자신이 한 일로 보람을 누리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끝과 징조를 보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일 뿐인 것입니다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에 신앙생활의 재미와 즐거움이 담겨 있습니까어찌보면 그 모든 내용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내용일 뿐입니다우리의 꿈과 희망과는 무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의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까아니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까당연히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그 작업을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쉬지 않고 행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생각이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자신의 입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말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역사를 감지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된 우리의 삶이며 신앙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그런 감사와 신앙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실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삶에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구원 받은 신자의 신앙인 것입니다오늘도 주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서 이런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존귀한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리의 생각과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의 의미는 어떻게 다르며그 다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오늘날 우리가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할 수 없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자신의 미래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어리석은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4. 유대인들이 꿈꾸는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내용과 목표는 어떻게 다릅니까?

5. 하나님이 종말을 ‘시초’에 알리셨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또 우리가 종말을 바라보면 어떠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까?

6. 인간이 꿈꾸는 삶과 주님이 제시한 신앙의 삶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자기중심적인 인생의 모습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변화된 인생은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8.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것과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9. 신자된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80 1월 28일 / 누가복음 125. (눅 23:1-7)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관리자 2018.01.27 160
379 1월 21일 / 누가복음 124. (눅22:63-71)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답하라 관리자 2018.01.19 106
378 1월 14일 / 누가복음 123. (눅22:54-62) 베드로의 부인과 그리고 통곡 관리자 2018.01.13 229
377 1월 7일 / 누가복음 122. (눅22:47-53)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관리자 2018.01.06 140
376 12월 31일 / (눅22:39-46)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 관리자 2017.12.30 241
375 12월 24일 / (눅22:35-38) 족함만이 있는 나라를 사는 신자 관리자 2017.12.30 184
374 12월 17일 / 믿음 16. (살후 1:1-4)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과 자람 관리자 2017.12.16 117
373 12월 10 일 / 믿음 15. (롬14:1-3)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 관리자 2017.12.09 251
372 12월 3일 / 믿음 14. (벧전 2:1-3)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과 성화 관리자 2017.12.02 120
371 11월 26일 / 믿음 13. (눅18:1-8) 신자의 믿음과 신자의 기도 관리자 2017.11.25 142
370 11월 19일 / 추수감사주일 / (사12:1-6) 주께 돌아온 자들의 노래와 감사 관리자 2017.11.18 135
369 11월 12일 / 믿음 12. (눅7:1-10) 백부장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관리자 2017.11.11 169
368 11월 5일 / 믿음 11. (롬 3:27-28) 믿음의 법과 율법의 행위 관리자 2017.11.04 94
» 10월 29일 / 믿음 10.(눅21:10-19) 이 세상의 끝과 그 징조 관리자 2017.10.28 174
366 10월 22일 / 믿음 9. (엡 2:8-10)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우리의 믿음 관리자 2017.10.22 136
365 10월 15일 / 믿음 8.(갈3:23-25)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이후 관리자 2017.10.15 155
364 10월 8일 / 믿음 7. (눅17:11-19) 돌아온 사마리아 나병환자 관리자 2017.10.08 225
363 10월 1일 / 믿음 6. (행14:8-10) 구원 받을 만한 믿음 관리자 2017.09.30 176
362 9월 24일 / 믿음 5. (고전 2:1-5) 믿음과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 관리자 2017.09.22 142
361 9월 17일 / 믿음 4. (히 11:1-2) 믿음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 관리자 2017.09.16 131
Board Pagination Prev 1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