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5,470
오늘 : 208
어제 : 363

페이지뷰

전체 : 78,760,552
오늘 : 805
어제 : 1,27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과 성화

본문 / 벧전 2: 1- 3

 

1.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대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믿음은 신자를 점차 변화시킨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또한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말은 성숙되지 않은 신자는 믿음이 없거나 또는 믿음이 약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신자의 믿음의 성숙 여부는 결국 행함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 또한 인간의 행함을 가르치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한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성경의 근거는 오늘 본문 2절의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고 하는 말씀 중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여기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성숙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면서, 믿음은 신자를 성숙하게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고 하고 그것을 성화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5)고 말씀하는데, 이 구절도 신자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수준을 향해서 자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성화를 주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 가르침을 따라 자라가기 위해, 즉 성화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고 또한 그것을 신앙의 정점으로 여겨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화되기 위해서는 화도 내지 않아야 하고, 성격도 고쳐야 할 뿐만아니라, 인자한 표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성을 내는 것도 자제할 수 있고, 항상 인자한 표정을 하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평생토록 자신의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분노를 자제하며 인자한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표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그동안 쌓았왔던 성화는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성화라는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2. 성화에 대한 오류 및 그리스도 안의 삶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 본질을 알게 되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화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에 대해 로마서 3장에 보면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0-18)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할 수 없는 본질을 가진 인간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위에서 말씀하는 로마서 3장에서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있기 전의 이야기일 뿐이고, 믿음이 있게 되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래서 믿음이 주어지면 성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주장대로 인간이 믿음으로 인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게 되었다면, 그런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 여전히 악을 행하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와 까닭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인간에게 악을 이길 능력도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도 왜 여전히 악을 행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라는 말로 답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구원 받은 인간이 믿음으로 인해서 선을 행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인간의 연약함과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악을 행하는 인간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선을 행할 수가 있어서 성화되어 갈 수 있다는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성화를 이루어 가다가도 악을 행함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쌓아 왔던 성화라는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성화되어 가다가도 무너지고 또 다시 성화되어 가다가 무너지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인간의 형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화의 허구성인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성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점차 완성되어 가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도 인간에게 있는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붙들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결단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가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믿음으로 인해서 달라지고 변화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주어졌는데도 그 믿음이 있기 전과 후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인한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이었던 존재가 믿음이 온 이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바뀐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자가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그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선으로 여기는 것들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또 자신이 그런 선을 행하는 동안 하나님과의 신앙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착각가운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 중심의 신앙생활을 가장 잘한 자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1.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1-4)고 합니다.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과실은 가지 스스로 맺을 수가 습니다. 과실이 맺어지는 능력은 포도나무에게 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고, 즉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포도나무를 의지하고 살아가겠습니까? 가지인 자신에게는 과실을 맺을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과실을 맺지 않으면 제해 버리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에게 제함을 받는 것이 곧 망함이고 실패임을 안다면 그런데 자신에게는 과실을 맺을 능력이 없음을 안다면 능력이 있는 포도나무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글고 이것을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주 안에서 거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살아오던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자를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이나 형편 또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성격이나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을 보고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없으면 안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에는 오직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가 되고 또 세상의 것이 원망과 불평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실체와 함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해도 그리스도 밖에서의 인생은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자된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자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돈이 없으면 한숨이 나왔는데 이제는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돈이 없어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성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라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더욱 굳건히 세워져 가는 삶이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이 되어가는 것이 진정한 성화며 자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행함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성화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엡 4:31-32절을 보면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1-32)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이라는 두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세계는 악함, 분노, 노함, 떠드는 것, 훼방이 있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인자함, 불쌍히 여김, 용서가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악함, 분노, 노함,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아닙니다. 나에게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분노와 시기와 악함과 노함을 보면서 나같은 자는 생명의 세계에는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용서가 나를 깨끗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의 본질입니다.

 

3. 참된 성화

그래서 신자가 믿음으로 할 것은 시기가 나쁜 것이니까 시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해도 나는 시기할 수밖에 없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나같은 자에게 얼마나 큰 은혜며 선물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음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아 그 맛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제부터 성화되어야지라는 결단을 하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순전하게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젖은 그들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아 알게 되면 자신을 살리는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사모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단지 성경을 많이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사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가 진심으로 구할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더욱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이고 또 이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점차 거룩해져가는 성화라는 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애당초 우리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으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거룩에 차별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를 거룩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또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열심히 스스로 거룩해지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도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멸시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인간의 힘과 공로로 인간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겠다고 하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떠나고 복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자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죄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죄에 붙들려서 눈만 뜨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예수님의 함께 하심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통하여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에게서 사랑이 나타나고, 인내가 나타나고, 절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신자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자기부인이며 또 이러한 자기 부인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자의 성화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자신 안에 사신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주안에서의 변화와 성화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변화와 인간이 이해하는 성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로 말미암아 이미 거룩한 자 되었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미도 거룩함을 입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항상 점검하고 확인하며 우리의 어리석고 무지함을 알아 주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알아 주안에서 나의 실체를 보며 주만 바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화는 무슨 뜻이며 또 그것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2.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본질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3.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화에 대한 오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믿음으로 말미암은 달라진 변화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 신자들의 관심의 내용과 그것을 잘못 알았을 때에 신앙은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6.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어떤 자가 주안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까?

7.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참된 성화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그리스도 밖의 세계와 그리스도 안의 세계의 본질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9. 참된 성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며 또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10. 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은 생각은 무엇이며, 예수님의 함께 하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11.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7 12월 26일 / 성탄예배 / (눅 1:26-38) 은혜를 받은 자여 관리자 2021.12.26 150
576 12월 26일 1부 / 도마의 믿음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 관리자 2010.12.24 1858
575 12월 27일 / 히브리서 9. (히 3:1-6) 집 맡은 아들과 그 집 관리자 2020.12.27 117
574 12월 27일/ 로마서 17. (롬3:27-30) 자랑이 없는 교회, 자랑이 있는 교회 관리자 2015.12.26 550
573 12월 28일 / 사도행전49 (행13:42-52)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관리자 2014.12.27 660
572 12월 29일 / 마가복음 83. (막 14:32-42) 깨어 있는 신앙과 자는 신앙 관리자 2019.12.28 128
571 12월 29일 / 사도행전1. (행1:1-5)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34 관리자 2013.12.29 2418
570 12월 2일 / 마가복음 30. (막 5:35-43) 회장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 관리자 2018.12.01 187
569 12월 2일 2부 / 단번에주신 믿음의 도의 뜻 관리자 2012.12.16 1509
568 12월 30일 / 마가복음 34. (막6:30-44) 이백 데나리온과 너희가 주라 관리자 2018.12.29 218
567 12월 30일 주일 1부 /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들이 한 말을 기억하라 13 관리자 2013.01.21 1473
566 12월 31일 / (눅22:39-46)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 관리자 2017.12.30 241
565 2023 12월 31일 / 요한계시록 42. (계12:1-6) 아이와 여자와 용 관리자 2023.12.31 9
» 12월 3일 / 믿음 14. (벧전 2:1-3)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과 성화 관리자 2017.12.02 120
563 2023 12월 3일 / 요한계시록 39. (계 11:3-6) 두 증인의 권 관리자 2023.12.03 10
562 2023 12월 3일 / 요한복음 23. (요 4:43-54)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자들 관리자 2023.12.03 9
561 12월 4일 / 로마서 63. (롬11:7-12) 구하는 그것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 관리자 2016.12.03 239
560 12월 4일 2부 / 우리의 소망되신 부활의 첫 열매 관리자 2011.12.03 1565
559 12월 5일 / 히브리서 56.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관리자 2021.12.05 115
558 12월 5일 2부 / 빈 무덤 앞에서의 알 수 없는 눈물 121 관리자 2010.12.03 1681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