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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족함만이 있는 나라를 사는 신자

본문 / 22:35-38

 

 

1. 예수님이 떠나시면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게 되면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시겠지만 예전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가시게 됩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함께 하신 예수님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감지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에게 여전히 가르쳐야 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삼년간 따라 다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메시아가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었다 해도 어쨌든 그들에게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걱정 없이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난 후입니다. 의지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 떠나게 된다면 제자들은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낙담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며 섬긴 사건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그들의 힘으로 한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로 인한 일이었기에 자연히 모세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간 모세가 40일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들이 따랐던 모세를 대신할 의지할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32:1)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모세를 대신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금송아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절실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홍해가 가로 막고 애굽 군대에 의해 몰살당할 위기도 해결한 모세가 자신들 곁에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때문에 모세의 부재는 곧 하나님의 부재와 다를 바 없기에 모세를 대신할 존재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좀 더 확실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체험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확실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도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한 것을 좇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불확실함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안함을 느꼈던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현실이 되면 불안함을 느낄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불안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의 곁에 없는 분처럼 여기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소유와 무관한 복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고 자신들과 함께 계셨을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모든 일을 예수님이 하시면 되었기에 아무런 문제도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신들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 힘이 없음을 느끼며 낙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보면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22:35)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없었나이다라고 답을 합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 보낼 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9:3)라고 하셨으며 또한 누가복음 10장에서는 따로 칠십 인을 세우시고 각 동네와 지역으로 둘씩 보내시며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10:4)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 말씀대로 지팡이, 배낭, 전대, 양식, , 두 벌 옷, 신발 등 여행에 필요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각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친 경험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 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때도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서로 함께 다닌 것이 아니라 각기 흩어져서 다녔을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그 당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보냄 받았음에도 아무 부족함이 없었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전대와 배낭과 신발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이 있다거나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없이 홀로 다닌다 해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장의 시작의 말씀처럼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대와 배낭과 신발이 없는 상태에서 여행을 한다면 부족함을 느꼈어야 합니다. 여행 기간이 며칠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루를 여행해도 필요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돈도 가지지 않은 채 여행을 했는데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답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쓸 것을 어떤 분들이 자발적으로 공급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또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매번 그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제자들의 말이 지극히 당연한 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제자들의 생존의 문제에는 불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굶으면서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는 지팡이나 배낭 그리고 양식이나 돈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복음은 능히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함이 없었다고 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자기 생존에 마음을 두었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이 불평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배낭, , 신발이나 두벌 옷도 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불평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마음을 둔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수시로 그와 같은 불평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가만히 오늘 말씀 앞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지금 살게 하신 것은 복음을 위해서이게 습니까? 아니면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생존하고 살라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신자라면 복음을 위해서 보냄 받았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 전파라는 것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소유가 많아 부요하면 복음이 더 강하게 전파되고, 반대로 우리의 소유가 적어 빈곤하면 복음이 전파 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소유 여부와 무관합니다. 물론 복음 전파를 위해 돈도 많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복음 전파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복음 전파를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참된 복음에서 벗어나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에만 마음을 둔다면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물으신다고 해도 우리는 제자들과 동일하게 없었나이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복음, 구원, 생명, 이 문제만 생각하면 분명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복음과 구원과 생명에 관한 한은 그 어떤 문제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늘 이 문제는 벗어 버리고 항상 육신과 연결된 생존에만 마음을 집중하기에 부족하다는 한탄과 함께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염려와 불안이 없고 오히려 족하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런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가진 것이 없으면 무시를 받게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가지지 않으면 생존이 힘들어지는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고 안 계신 세상은 제자들에게는 더욱 험악한 곳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3. 소유의 나라와 예언의 성취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22:36)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할 때에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할 정도로 따랐기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어도 숙식을 제공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즉 제자들만 남겨진 이후에는 예수님이 계실 때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대나 배낭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이 부딪힐 세상은 가진 자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가진 자의 나라에서 예수님께 보냄 받은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진 자의 나라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 존재합니다. 그 말은 결국 세상이 환영하지 않는 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7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22:37)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에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2)는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의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과 이사야서의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는 말이 같은 의미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범죄자로 여김 받고 죄인을 위해 피 흘려죽으시는 고난의 메시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이 이제 이루어져 감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잡으러 온 자들 중 한 사람의 귀를 칼로 쳐서 상하게 되자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보고 예수님은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26:53-54)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검을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은 37절 말씀에 불법자의 동류라고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무죄한 자가 죽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불법자라는 말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죄한 분이 죽으셨다고 알고 믿는데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법이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죄를 만들어서라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자들도 죄도 없는 분을 죽일 수는 없으니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예수님을 처형할 수 있는 로마가 보기에 로마를 반역하는 무리로 보여야만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23:1-2)라고 합니다. 이 고소의 내용은 한마디로 로마를 반역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검을 가지라고 한 것은 불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사야 53장의 예언,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53:12)는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 예수님은 검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4. 제자의 길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제자들이 경험할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유의 세상에서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세상에 눈을 맞추고 세상처럼 내게 있는 것을 나의 소유로 여기며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살아갑니까? 이러한 삶에서는 불안과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나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비록 몸은 예수님과 헤어졌지만 예수님을 자기 곁에 계시지 않은 분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라는 생각 없이, 무슨 일에 부족함이 없이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영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눈을 뜬 신자가 족함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런 신자는 싸워서 내 것을 쟁취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22:38)라고 했을 때 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검을 준비하는 의미를 몰라 그것으로 자신들을 지키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같은 검으로 말씀의 성취를 이루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오직 생존을 위해 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성취를 보며 삽니다. 신자는 자신이 싸우고 지켜야 하는 방식의 삶에 합류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신자가 합류한 세상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불법자의 동류가 되신 예수님이 족함이 되고 항상 나의 죄인 됨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궁히 깨달으며 주를 찾는 방식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찬송과 감사만 가득할 뿐 부족하다는 아우성이 없습니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심령이 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속한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바르게 알아 우리의 삶에서 오직 말씀만이 성취되어지고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위한 말씀이라고 합니까?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에 금송아지를 만든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의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보냄 받았을 때 부족함이 없었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오늘날 우리가 제자들과 같이 주께 보냄을 받았음에도 불평이 많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주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제는 전대나 배낭을 가지라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또 주께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 사라고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우리의 삶에 불안과 염려가 떠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신자들이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검을 사라고 하신 주의 뜻과 그것을 모르는 제자들은 모습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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