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 마가복음 21. (막 4:1-9) 씨 뿌리는 비유와 그 해석(9월 23일 1부)

by 관리자 posted Sep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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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씨 뿌리는 비유와 그 해석

본문 / 4: 1- 9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4:1-9)

 

1. 예수님의 가족 찾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고 또 미쳤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비록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지만 모여든 그들 모두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믿음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예수님을 믿는다며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오직 진리의 말씀을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이기 때문에 오직 말씀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생각처럼 단지 열심히 있다고 해서 신자로 간주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네 종류의 땅에 씨를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모친과 형제들을 거부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고 자매고 어머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관계는 혈통과 외적인 조건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립되는 것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결국 그 말씀의 의미는 인간이 어떤 능력을 행하든 또 기도를 하든, 봉사를 하던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로 드러나게 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그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의 여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떨어져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가족을 찾기 위해 오늘 본문에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네 종류의 땅

오늘 본문에 보면 네 종류의 땅이 나오는데 어느 것이 좋은 땅이냐는 것은 결국 씨가 뿌려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4:8)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좋은 땅은 씨가 떨어지면 그 씨가 땅에 정착이 되고 많은 열매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네 종류의 땅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길가의 땅이 있습니다. 이 땅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이 말씀의 해석을 15절에 보면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4:15)라고 하여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는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는다는 것은, 말씀의 가치 자체를 무시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게 떨어진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가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이 아니라 생명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합니다.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방인과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말씀보다는 자신의 귀를 만족시켜주는 말을 기대할 뿐인 것입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직 세상에 가치를 두게 합니다. 세상의 것을 복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까지도 자신들이 기대하는 세상의 복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분으로 알게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이니 진리니 하는 것은 관심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받고 복을 받을 것인가에만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땅의 것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을 복음처럼 여겨지고 정작 참된 복음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 밭은 흙이 얇은 돌밭입니다. 이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오기는 하지만 해가 돋은 후에 말라버립니다. 이 땅을 16절부터 보면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4:16-17)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환난과 핍박이 없는 형편에서는 말씀으로 인해서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도 그 기쁨이 유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쁨, 즉 진리로 인한 기쁨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참된 기쁨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환난과 핍박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참된 기쁨은 환난과 핍박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환난과 핍박을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금 말씀을 듣고 은혜가 되어서 아멘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신자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역시 그것으로 신자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환난과 핍박이 주어져봐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핍박에서 낙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역사하는 신자라면 낙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땅은 가시떨기 땅입니다. 이 땅은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음으로 결실치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18절부터 보면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4:18-19)라는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세상의 염려가 있고 재리의 유혹이 있고 욕심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러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자기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있는 것도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 역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받는 유혹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재리의 유혹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것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원하는 인생을 책임지는 분이 아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든 삶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시떨기가 그 기운을 막은 상태입니다. 마지감으로 네 번째 좋은 땅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20절에 보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4:20)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우리들은 우리도 좋은 땅이 되어서 열매를 많이 맺자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바꿀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땅으로 비유를 하셨으니 땅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돌밭이 스스로 좋은 땅으로 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가시떨기 밭이 스스로 좋은 땅으로 변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땅은 없습니다. 땅은 오직 농부에 의해서만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땅에 맺어지는 결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그러한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증거로 나타나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맺어지는 말씀의 결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로 하여금 주를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말씀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가치가 세상의 어떤 유혹에서도 말씀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고, 환난과 핍박에서도 말씀으로 인해서 생명의 나라를 소망하는 인내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3. 신자란

세상의 돈이나 권략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마음에 떨어진 말씀이 결실한 결과인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생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과연 우리에게 하신 이 말씀의 가치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는지 또한 환난과 핍박에서도 주를 바라보게 하는지를 점검하셔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평생에 있어야 할 전쟁이며 문제인 것입니다. 항상 우리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는 것, 그래서 진리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힘쓰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이 다스리는 삶을 산다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생을 붙드시고 책임지고 계심을 말씀으로 인해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를 성경은 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서 내 입으로 나를 신자라고 하기에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들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늘 보여 지는 것은 좋은 땅의 결실이 아니라 길가 밭이나 돌 밭 아니면 가시떨기 밭의 현상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책임지시고 좋은 땅으로 만들어 가심을 믿기 때문에 낙심보다는 우리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 좋은 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결국 의인이 없기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땅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는 그러한 땅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땅이라고 해서 흙이 금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이 떨어지면 열매가 맺어지는 땅일 뿐입니다. 세상에 없는 땅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인 우리에게서 말씀의 결실이 보인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또는 그 결실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결실을 있게 하신 에수님 만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을 받는 거룩한 심령이 되어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결실 가능한 좋은 땅으로 살아가는 예원가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 후에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씨가 길가에 뿌려 졌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입니까?

3. 씨가 흙이 얇은 돌 밭에 뿌려 졌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입니까?

4. 씨가 가시떨기에 뿌려 졌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입니까?

5.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말씀의 우리와 성경의 해석은 어떻게 다릅니까?

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있어야할 신앙의 싸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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