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1,300
오늘 : 18
어제 : 217

페이지뷰

전체 : 78,741,797
오늘 : 65
어제 : 2,16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주가 쓰시겠다고 한 나귀

본문 / 막11: 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막11:1-11)

 

1. 미쁘신 하나님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학교나 직장, 남편 또는 아내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물건을 하나 사는 것까지도 우리 자신이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을 하는 순간만 해도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에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될 때에 좀 더 신중하게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신중하게 선택을 한다고 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될 때에 나중의 결과에 대하여 까지 미리 예상을 하면서 선택을 한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보장을 과연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후회는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결과를 미리 알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그 결과까지 미리 예정된 가운데 하시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 즉 우리의 결과까지 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에 우리를 안심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실패와 악한 길로 인도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는 항상 선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선택에 맡겨 살아가는 것보다 더 안심되는 것은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지금 현재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를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했기에 내가 선택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는 행복이라는 착각과 함께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모습을 탐심이며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주가 쓰시겠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타고가실 나귀를 제자들을 보내서 끌어 오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 나귀는 제자들이 임의대로 가서 골라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져 있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그 나귀를 끌어 오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귀의 주인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나귀의 소유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나귀를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도 않고 무작정 끌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누가 ‘왜 이리 하느냐’라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그가 즉시 보낼 것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참으로 일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로는 먼저 예수님이 쓰실 나귀의 주인을 찾아서 그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래도 주인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나귀를 선택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상황까지도 예수님의 선택대로 되어질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끌어 올 때에 일어날 일과 그리고 그 대처 방안과 그 결과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택하시고 일하시는 것에는 실패와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씀이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면 무조건 내 놔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자기 멋대로 왜곡되게 해석하여 교회의 일에 필요한 것이면 곧 주가 쓰시는 것이고 따라서 교인들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내 놔야 한다는 말까지 합니다만 그것은 강도일 뿐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 사용되어질 나귀가 과연 예수님이 탈만한 힘이 있고 외형적으로도 쓸 만 한 나귀냐 라는 것을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 한 마디로 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가 쓰신다고 하면 필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하시는 주의 능력인 것이지 나귀 새끼가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결국 나귀새끼가 약하든 강하든 나귀 새끼가 주의 일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나귀는 주가 자신을 사용하실 것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는 나귀가 주님이 사용하기에 필요할 만큼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귀를 쓰시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 그저 쓰임 받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도록 미리 자신의 신앙을 키우며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성경 적으로는 맞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내가 준비되어 있지 못해서 주가 사용하지 못할 것이 염려스러워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 선동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사용되는 도구로 쓰임 받는 일에 인간의 조건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갖추고 있는 조건이나 실력이 주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은 주의 능력으로 주가 이루실 뿐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의 뜻에 의해 사용되어 지는 것뿐인 것입니다.

 

3. 주의 도구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시고자 하는 나귀 주인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보면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막11:4-6)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풀어 예수님께 끌고 가려 하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 주인이 ‘왜 나귀를 푸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시한 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자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나귀를 데려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당시의 나귀는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가 쓰신다는 말 한마디에 주저 없이 데려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또 나귀의 주인은 데려가는 자신의 나귀를 어디에 쓰려는지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들의 ‘주가 쓰신다’는 말에 의해서 모든 것이 복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의 신자들을 보면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 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자신이 주님께 사용되어 지는 용도와 방향을 자신이 미리 선택을 하고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선교사로 사용해달라거나 아니면 물질의 복을 주셔서 구제나 선교를 많이 하는 도구로 사용해 달라고 하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사용되기를 원하면서 자신이 쓰임 받는 용도와 방향과 목적에 대하여 자신이 정하여 그렇게 사용해 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주안에서 옳은 것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데 있어 배우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배역만 골라서 하고자 한다면 그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자나 감독의 의도대로 잘 만들어 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저마다 자신의 선택을 가지고 자신이 그런 주의 도구가 되겠다고 한다면 주의 일은 이루어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구가 어떻게 또 어떤 용도로 어디에 사용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도구를 선택하시는 분의 뜻인 것입니다. 도구는 다만 사용하시는 그 분의 뜻에 순종되어지는 것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자신이 예수님이 의해 사용되는 도구임을 알고 믿는다면 지금 자신의 그대로를 예수님이 사용하고 계심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서 살게 해달라는 간절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인생이 항상 예수님에 의해서 선택되고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자기 인생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후회가 남게 됨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선택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가 쓰신다는 말은 우리 인생은 아예 주님에 의해서 저당 잡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인생은 나를 위한 인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인생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며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구약 성경 스가랴서 9장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기록되어 있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나귀 새끼는 예수님이 곧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증거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은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예수님을 위한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의해 부름 받은 도구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가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주가 자신을 쓰신다는 것을 아는 신자는 모든 것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실망하거나 교만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증거자로 살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오늘 본문의 나귀의 주인처럼 주가 쓰신다는 말 앞에서는 ‘내 것’이라는 개념도 사라질 뿐입니다. 나귀 주인이 만약 ‘나귀는 내 것이다’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귀를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의해서 두말없이 나귀를 보내는 것은 나귀의 소유도 내가 아니고 주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인이시며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주가 우리 모두를 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안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가 의도한 대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고 그리고 결국 그 결과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러한 말에 대해 우리 속에서는 ‘그럼 나는 뭔가?’라는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주님에 의해서 보내진 인생이고, 주님 때문에 존재하는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내가 뜻하는 인생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주께 저당 잡힌 인생이라는 것이 더 큰 복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이 복으로 여겨지는 그것이야 말로 놀라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깨달아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 우리를 언제든지 또 어떤 역할로든지 내어 드릴 수 있는 복 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사는 삶에 있어 후회가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안심이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모습과 또 성경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예수님이 사용하실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는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내용이 우리가 생 각하는 상식적인 내용과 어떻게 다릅니까?

5. 오늘 본문의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무엇이며 또 그 해석은 교인 들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합니까?

6. 오늘 본문의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 달라’는 기도에 담긴 잘못된 이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본문에 나귀 주인이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그냥 내어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난 참 된 믿음과 신앙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스가랴서 9장의 말씀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11.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73 8월 8일 / 히브리서 40. (히 10:19-25) 새로운 살 길 관리자 2021.08.07 90
672 8월 7일 2부 /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50 관리자 2011.08.13 2635
671 2022 8월 7일 / (약 1:26-27)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 관리자 2022.08.07 310
670 2023 8월 6일 / 요한복음 12. (요 3:1-8) 사람의 거듭 관리자 2023.08.06 17
669 2023 8월 6일 / 요한계시록 23. (계 6:7-8) 넷째 인 관리자 2023.08.06 12
668 8월 6일 / (마 6:9-13) 시험과 죄악에 대한 바른 이해 관리자 2017.08.05 92
667 8월 5일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월절을 지키라 9 관리자 2012.08.16 1425
666 8월 5일 / 마가복음 14. (막 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관리자 2018.08.04 109
» 8월 4일 / 마가복음 63. (막 11:1-11) 주가 쓰시겠다고 한 나귀 관리자 2019.08.03 91
664 8월 31일 / 사도행전33. (행8:14-17)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슴을 받았다 함을 듣고 관리자 2014.08.30 704
663 8월 30일 / 로마서 2. (롬1:1-7)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관리자 2015.08.29 456
662 8월 30일 / 갈라디아서 19. (갈 5:13-15) 얻은 자유로 종노릇 하라 관리자 2020.08.30 111
661 8월 2일 / 사도행전79. (행27:20-26) 내게 말씀하신 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관리자 2015.08.01 438
660 8월 2일 / 갈라디아서 15. (갈 4:12-20)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관리자 2020.08.02 164
659 8월 29일 1부 / 오해된 신앙과 합격점을 받는 신앙 관리자 2010.08.28 1385
658 8월 29일 / 히브리서 43. (히 10:36-39) 믿음으로 사는 의인 관리자 2021.09.11 140
657 8월 28일 1부 / 주 안에서의 바른 질서와 삶 관리자 2011.08.28 2032
656 8월 28일 / 로마서 50. (롬8:35-39) 우리에게는 없는 낯선 사랑 관리자 2016.08.27 189
655 2023 8월 27일 / 요한계시록 26. (계 7:1*-3) 세상의 현 관리자 2023.08.27 9
654 8월 27일 / 믿음 1.(롬 4:1-8) 우리른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관리자 2017.08.26 13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