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0,413
오늘 : 112
어제 : 287

페이지뷰

전체 : 78,736,078
오늘 : 511
어제 : 1,64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주인 되기 원하는 악한 농부들

본문 / 12: 1-12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12:1-12)

 

1. 악한 농부

오늘 본문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신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반발하는 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왜 인간이 악하며 또 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들에 대하여 평가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아마도 두말할 것 없이 악하다라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들의 행실은 누가 보든지 간에 악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들을 심판하고 진멸한다고 해도 사실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그렇게 심판받고 진멸 받아야할 그 악한 농부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악한 농부와 나는 다르다라고 항변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모두는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농부들은 주인이 손수 만든 포도원을 세를 주고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만약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지 않았다면 농부들은 포도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자들이기에 당연히 포도원도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세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농부인 그들은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 농부들이기에 포도를 수확할 때에 포도원의 주인에게 소출 얼마를 세로 바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이 그런 소출을 받으려고 보낸 종을 죽여 버립니다. 포도원을 자신들에게 세로 준 주인의 은혜보다는 자기들이 열심히 일해서 수확한 포도를 포도원 주인에게 내 준다는 것이 아까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농부들에게 오늘 본문에 주인은 행여 그들이 자신의 아들은 죽이지 않고 공경할 것이라고 여기고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만 죽이면 자신들이 그 유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이처럼 주인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베푼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이 행위야 말로 주인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스라엘다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농부들에 대한 내용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이스라엘의 실상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그러한 이스라엘의 실상이 곧 우리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이 바로 오늘 본문의 악한 농부들이고 또 주인이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악한 농부이고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오늘 본문의 악한 농부와는 다르게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 생활을 하며 사는 동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 또한 그런 사고방식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우리 생각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자들입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의 악한 농부와는 다르게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사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비유에서 말씀하는 악한 농부는 사실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마땅한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악한 자였습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분을 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12:12)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분을 품고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아무리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그 말씀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분을 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안다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인간의 실력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잡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 인간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악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듣고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높아지며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 그러한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자신의 악함으로 고백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악함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한 것도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끝까지 자신을 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존재하고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만큼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들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들이 버림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자신들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면 이스라엘에게는 자신들을 그렇게 되게 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악한 자신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로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자신들에게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존재일 뿐인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에 있게 하셨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감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의 비유를 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죽이고, 심지어는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자신들이 주인인 인생으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인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아들이신 예수님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반응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러한 세상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시각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12:10-11)고 말씀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는 것은 건축자들이 보기에는 쓸모없는 돌임을 뜻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것은 건축자들이 원하는 집을 짓기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예수님이 세상으로 부터 당할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적 시각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돌로 천대를 받고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은 결국 건축자들은 쓸모없다고 여겨 버린 돌인데 하나님께는 매우 쓸모 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건축자로 상징되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천국과 상관없는 멸망의 자식들이라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이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뜻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 귀한 머릿돌이라면 천국 백성들에게도 예수님은 귀한 머릿돌로 여겨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보신다면, 우리의 눈에도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마땅히 심판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서기관과 제사장 그리고 장로들은 유대사회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김을 받으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린 것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또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아들만 없다면 주인의 것을 모두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농부들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인생도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생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아들이 와서 자신들을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저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많이 거둔 자신들의 공로를 칭찬해주기만을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이며 또 세상이 꿈꾸는 자기 인생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주인이 돼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인생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인생에 끼어들어서 우리를 악하다고 하고 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외치시는 예수님을 좋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십니까? 세상의 재물이나 풍요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런 나라를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 받는 것은 관심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는 나라를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결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고 원하는 나라는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가 영광을 받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주인이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함이라는 것을 모른 채, 내가 원하는 나라를 이루어줄 예수님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우리에게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예수님은 버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내가 벌린 사건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무릎 꿇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신앙이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가 바로 나라는 것을 절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악한 농부라는 것을 절감했을 때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되어지는 구원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자신의 악함을 절감하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은혜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실체를 볼 수 있기를 그래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오늘 비유로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오늘 본문의 농부들의 악함은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3. 오늘날 우리가 오늘 본문의 악한 농부들과 전혀 다르다고 여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리의 말씀으로 자신의 실상이 드러날 때 인간의 반응과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다릅니까?

5.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이스라엘에게 하나님만이 유일한 가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8.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본문의 농부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꿈꾸는 인생은 무엇이며 또 그런 자들이 하나님 께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0. 오늘 본문의 악한 농부가 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11.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33 2024 요한계시록 56. (계 16:8-11) 회개하지 아니하는 인간들 관리자 2024.04.21 3
732 9월 9일 1부 / 하나님의 열심으로 중매하는 중매자 관리자 2012.09.09 1616
731 9월 9일 / 마가복음 19. (막3;20-30) 사하심이 없는 성령 모독죄 관리자 2018.09.09 100
» 9월 8일 / 마가복음 68. (막 12:1-12) 주인되기 원하는 악한 농부들 관리자 2019.09.07 83
729 9월 7일 / 사도행전34. (행8:26-40) 빌립을 통로로 하는 성령의 전도 관리자 2014.09.06 332
728 9월 6일 / 로마서 3. (롬1:8-13) 같은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들의 삶 관리자 2015.09.05 437
727 9월 6일 / 갈라디아서 20. (갈 5:16-18) 성령을 따라 행하라 관리자 2020.09.06 110
726 9월 5일 / 히브리서44. (히 11: 1-3)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관리자 2021.09.11 212
725 9월 4일 2부 / 주의 성찬에 담겨진 의미 2 관리자 2011.09.03 1909
724 9월 4일 / 로마서 51. (롬9:1-5) 바울의 큰 근심과 신자의 복 관리자 2016.09.03 260
723 2023 9월 3일 / 요한복음 15. (요 3:22-30) 요한의 기쁨 관리자 2023.09.03 12
722 2023 9월 3일 / 요한계시록 27. (계 7:4-8) 인 맞은 관리자 2023.09.03 8
721 9월 3일 / 믿음 2. (눅17:1-10) 믿음의 능력에 대한 오해와 진실 관리자 2017.09.02 153
720 9월 3일 / 마가복음 18. (막 3:13-19) 제자를 부르시는 뜻과 목적 관리자 2018.09.01 152
719 9월 30일 1부 /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에 하는 바울의 자랑 관리자 2012.09.26 1769
718 9월 30일 / 마가복음 22. (막4:1-9) 농부의 일하심과 그 결과 관리자 2018.09.29 99
717 9월 2일 2부 / 육신적인 자랑과 주 안에서의 자랑 관리자 2012.09.02 1539
716 9월 29일 / 야고보서21.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283 관리자 2013.10.06 10359
715 9월 29일 / 마가복음 71.(막 12:28-34) 서기관의 지혜와 신자의 삶 관리자 2019.09.29 113
714 9월 28일 / 사도행전37. (행9:19-31)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함 관리자 2014.09.26 60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