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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의 무너져야할 성전 신앙(13: 1- 2)

 

1. 이스라엘의 성전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그들의 신앙세계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전에서의 제사는 그들의 신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오직 성전에서만 할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에 성전이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13:2)고 예언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성전인데, 예수님은 왜 그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왜 무너져야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성전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부심이 어떠했는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13:1)라고 말합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 불려 졌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 첫 번째 성전은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 성전입니다. 이 솔로몬 성전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의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을 때 무너져 내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스룹바벨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였는데 그 성전을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재건된 스룹바벨 성전은 그 전의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그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 크고 화려하게 증축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 번째 성전인 헤롯 성전이라고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증축한 헤롯 성전은 아주 크고 화려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성전을 제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의미로 예수님께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13:1)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자기들 곁에 있는 크고 화려한 성전을 바라보면서 그 성전을 자신들의 구원의 통로로 여겼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성전은 무너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사단의 유혹

우리가 알고 또 믿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의 통로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바라볼 것도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라고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통로가 될 수가 없으며 또 거룩한 곳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할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믿음의 걸림돌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단의 미혹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보이는 것에 거룩의 의미를 두게 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진정한 거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의 시선을 거두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예배당을 향한 시선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당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때문에 예배당을 더 크고 더 화려하게 지어야 한다고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치장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과 더불어 거룩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라면 그 모든 것은 예수님 앞에 무너져야 할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배당이 신자들의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또 교회가 믿음의 걸림돌이 되는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시대와 결코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세태인 것입니다.

 

구원의 통로는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우리 구원의 능력으로 바라보며, 예수님만을 우리의 의로 바라볼 뿐,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에 두지 않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예배당도, 교회도 또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종교적 행위와 선행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 바라보면서 예수님만을 우리 구원의 유일하고 전부가 되시는 분으로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보이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오직 예수님의 의만 굳게 세워져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이미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보이는 것을 다시 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교성으로 말미암아 그 보이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자기 신앙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기도라는 행위, 성경읽기라는 행위처럼 신앙의 거룩한 모습으로 인정되는 행위가 없으면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하여 항상 불안감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이 무너뜨린 것을 자기 스스로 다시 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거두어 버리신 믿음의 걸림돌을 스스로 자기 앞에 다시 놓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자기 속에 여전히 무너뜨려져야할 성전을 세워 놓은 채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는 위선적인 믿음이 가득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며, 교인들의 거짓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과연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러한 것들을 신앙이라고 듣고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대로 신앙과 믿음의 행위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도리어 우리 신앙의 걸림돌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교회에서 그렇게 행하는 것들이 악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자기 행함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여기고 또 그런 행함이 있기에 그런 행위를 하는 자신이 믿음이 있는 자라고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앙에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행하든 그것을 의로운 것으로 또 거룩한 것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전이 있다고 해도 성전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어떤 방편이나 도구로 여기지 않았다면 성전이 무너져야 한다는 예언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는 것이 있으면 꼭 그것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함만이 의로운 것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해도 여전히 우리들 속에서는 믿음이 있으면 실천을 해야 한다는 속삭임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단의 미혹임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3. 무너져야 할 성전신앙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다음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성전을 바라보고 성전을 의지하는 신앙은 마지막 때 구원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마지막 때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신자가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또 무엇을 해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신앙 형태가 예수님 당시와 같은 성전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그리고 기도와 전도 등을 신앙으로 강조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믿음에 있다는 안도감을 얻게 하기 위해서 목사가 말하는 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성전신앙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이것은 이미 선지자들이 외쳤던 말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 7장에 보면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7:4-7)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고 약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참된 성전은 예수님이시고,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이 또 다시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고 신앙의 내용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더러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세상에 보이는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행함 또한 동일합니다. 모두 사라지고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여기는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행함과 실천에는 그때의 기분과 감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행하고, 좋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형편에 따라서도 행함은 변하기도 하고, 건강에 의해서도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기분과 감정 그리고 형편이나 건강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행함을 보일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다가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돕지 않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행함을 어떻게 의로운 것으로 여길 수가 있고 또 믿음의 실천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그 무엇도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할 의가 되지 못하고 선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의를 믿고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신앙의 충족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충족된 상태에서 우리 행함을 바라보게 되면 항상 부족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행함을 동원해서 채우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너져야 할 성전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은 그런 부족함을 우리의 행함으로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온전하신 분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행위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만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며 오직 주의 은혜만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며 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미도 많은 부분이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채로 살아갑니다. 신앙이 아닌 것을 신앙이라고 또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믿으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주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무너져야할 성전신앙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을 바르게 세우려면 오직 주의 말씀 앞에 서야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는 일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주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어서 진정으로 무너져야할 거짓 신앙과 성전신앙을 바르게 분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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