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누가 너희를 꾀더냐
본문 / 갈 3: 1- 9
1. 복음의 핵심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가만히 들어온 어떤 자들이 할례를 행하여야 된다고 하니 그들의 말에 흔들리고 넘어간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라고 책망을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못 박히신 분을 하나님께서 살려내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다 포함은 되지만 가장 간단하게 복음을 축약한 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라고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표적도 아니요 지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복음이 갈라디아 인들에게 전하여 졌을 때에 이들이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밝히 드러나게 증거를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 자신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당시에 십자가는 십자가라는 말만 나와도 끔찍하여 소름 돋는 말입니다. 로마시대 때에 로마를 반역한 중범 자들을 십자가에 처형을 하는데 로마시민은 사형을 시켜도 십자가형에는 처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고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누가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럼에도 그런 예수님이 믿어진다면 그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2. 은혜로 들리는 복음
그러면서 2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에게 알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며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냐 듣고 믿음이냐’고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인데 그것을 믿었다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함으로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또다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내가 믿어 주었기에 성령을 받았다고 할까봐서 믿고 들음이라는 단어에 각주를 달아서 다르게 번역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절에 ‘듣고’ 앞에 1)이라는 숫자가 써져 있고, 그것을 성경 맨 밑에 각주에 가보면 ‘1) 또는, 믿음으로 들음에서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 본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내가 너희에게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더냐? 아니면 믿음을 들음으로써냐?”(갈3:2 /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았어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그들을 따라가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 질문으로 양자택일의 문제를 던집니다. 이것은 곧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들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에 보면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4-17)고 하여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들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의 말씀은 이사야서 53장을 인용한 것으로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사53:1)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도 보면 ‘전한’이라는 말씀 앞에 6)이라고 되어 있고, 이것을 성경 맨 밑의 각주를 보면 ‘들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사53:1 / 표준새번역)라고 합니다.
그리고 2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이 메시아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아에 대한 모습이 아닌 고난 받고 죽어야할 모습의 메시아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들어도 전해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사53:1 / 표준새번역)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의 예수님을 전하였는데도 그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로 메시아로 믿는다면 결국 인간의 실력이 아닌 은혜인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행15:7)라고 하여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주장하며 전파하는 자의 소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들음'은 전파하는 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행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보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라고 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어리석다고 하고서는 3절에서 다시 어리석다고 합니다.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다고 하거나 성령이 임하여 믿었다고 하거나 간에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전적인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은혜라고 하고서는 끝에서 행함으로 결론이 내리면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결론을 잘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절부터 보면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3:4-5)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기에 따르는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고 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에게는 가족에게서도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핍박을 받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핍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있기에 바른 복음이 전하여지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기에 괴로움을 받았지만 그러나 복음의 능력이 그보다 더 강력하기에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에 넘어가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증을 위하여 5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를 의롭다고 하여준 내용은 창세기 15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계속하여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더 상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에 대하여만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75세에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십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는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믿음이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아브람이란 사람이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 아브라함의 전 생애인 것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던지 자신의 아내가 아름다워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여보 당신이 아니라 오빠 동생하면서 다녔습니다. 바로 왕에게 자기 아내를 팔아먹고 소떼와 양떼를 받은 자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입니다.
바로 왕이 하나님께 혼이 나서 손도 대지 못하고 아내를 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318명으로 4명의 왕으로 된 연합군을 물리치고 조카를 구하여 옵니다. 도저히 아브라함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결혼하여 아이를 한 번도 낳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너희 후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시자 아브라함이 믿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행위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시고 그것을 의롭다고 합니다. 마치 천지 창조를 하나님이 홀로 다 마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믿음이 무엇인지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고 합니다. 여러 자손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3:7-8)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음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복이 누구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까? 이방인도 해당이 됩니다.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란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꾀고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무엇이 우리를 꾀고 있습니까? 모든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게 됩니다. 그것은 온갖 방법으로 다 나타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유혹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3. 가만히 들어 온 자들
우선 이단들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한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열심을 내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신천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외국에서 들어왔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신천지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피조물로만 믿으니 이단입니다.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다고 믿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언약을 이야기하고, 새 언약과 유월절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지상의 가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살과 피로 자녀가 생기듯이, 하늘 가족도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의 살과 피로서 하늘의 자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살과 피를 이어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 유월절 이야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이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인데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와서 이루어졌고 성경의 마지막 비밀이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 유월절로 온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는 어머니 하나님이 성경의 마지막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태양신의 절기이며, 일요일도 그러하기에 그들은 토요일을 지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의 교주가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신천지는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그들의 말로 총회장이라는 이만희만이 성경의 계시를 풀어낼 수가 있기에 누구든지 이만희만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창세기와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와 요한계시록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교리를 교묘하게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에 누가 많이 포섭되어 들어가게 됩니까?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까?
신천지의 교육장을 맡았던 어떤 분이 신천지의 잘못을 알고 나와서 신천지를 고발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결론부분을 보면 교회가 잘못하였기에 이단들이 양산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에 공감이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였다면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전하여 질 때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주제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백여 년 전에는 환경이 어려워서 이런 것이 먹혀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곳에 가느냐고, 물으면 그런답니다. 집 안에 종교는 하나 있는 것이 좋은 것 같고 또 부모가 먼저 다니면서 자기에게도 가라고 하니 효도차원에서도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믿어지지는 않지만 혹 있다면 종교생활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라는 것을 질문을 통하여 토하여 내도록 하니 그런 본색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 뒤로 새마을 운동과 함께 잘 살아보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함께 동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유행한 번영 신학이 한국교회의 큰 흐름이 되었습니다. 삼박자 구원이라든지, 예수 믿고 복 받자는 이야기, 긍정의 힘 등 이런 식의 다른 복음들이 교회의 강단을 채웠습니다. 경제의 성장과 함께 교회도 물질문명에 휩싸였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평가가 세상의 부와 지위를 차지하는 것에 달린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곳에서 세상의 경쟁과 상업주의와 자본주의 원리가 그대로 흘러들어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경쟁에 뒤처지고 교회의 프로그램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이 소외됩니다. 이들에게 이단들이 접근하여 성경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에 혹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런 이단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니 덜 위험합니다.
더 위험한 것은 교회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만들어진 주의 백성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교회가 유혹이 됩니다.
보암직한 교회, 세상의 자랑이 되는 교회 그래서 온갖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름들을 다 갖다 부칩니다. 행복, 꿈, 비전, 왕성, 창대, 제일, 중앙, 희망, 참 좋은, 복된, 풍성한, 넘치는 등등 이런 이름들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중의 교회, 교회를 빛내는 교회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하여 믿는 믿음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지 아니하면 지금 꾐에 넘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십니까? 우리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며 우리는 그 앞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답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