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일방적인 약속과 상호적인 율법
본문 / 갈 3:15-22
1. 변개할 수 없는 언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아주 짧은 시간에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문장 안에 들어있는 역사의 시간을 보게 되면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과 율법을 받은 모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시간인 무려 2천년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보는 오늘 이 시간까지 생각해 보면 무려 4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정말 짧은 시간에 다 보고 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알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오직 주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믿게 하여 주시기를 사모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3:15)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사람의 예로 말하겠다고 하면서, 사람도 한번 언약한 것을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언약한 내용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겠습니까? 또 반대로는 폐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위안부 합의 문제나 강제징용에 대한 문제 같은 것이 그런 예입니다. 한쪽은 두 나라간의 협의로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하는 반면에. 한쪽은 당사자들이 제외 된 상태에서의 협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대법원까지 판결이 올라갔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협의안을 가지고 두 당사자의 시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재협상 내지는 폐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언약이기에 사람의 언약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런 언약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유언은 한 사람이 죽었기에 그 언약을 폐하거나 더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유언은 유언한 당자사가 살아있을 동안에 변경할 수 있지만 그 원본을 직접 수정하지는 못하고 별도로 각주로 달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언한 당사자가 죽으면 그 유언은 더 이상 수정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언약도 이러한데 하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더 확정적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내용입니다. 사람이 변개하고 고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야 조석변개로 변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반드시 그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의 언약
그런데 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과 모세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다른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데, 왜 모세 언약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여야 산다고 하였느냐는 말입니다. 이 논쟁이 이스라엘만의 논쟁이 아니라 교회 역사 2천년 동안 이어지는 논쟁입니다. 이 논쟁을 다른 말로 하면 오직 믿음으로냐 아니냐는 싸움입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절충안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아닌 인간의 열심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곳도 있고, 노골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고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전통 칼뱅주의라고 말은 하면서도 믿음은 구원 얻고 천국 가는 일에만 필요하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은 행위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십인십색인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고 합니다.
사람의 언약도 함부로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가 되느냐는 말을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지만 그 자손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단수로 네 자손, 네 씨에게 준다고 하셨다는 말씀에 바울이 주목합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아브라함의 자식은 여러 명입니다. 먼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난 후에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은 그 후에 그두라를 맞이하여 6명의 자녀를 더 낳고 그의 후손들이 퍼져나가는 것을 창세기 25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수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복수로 사용하지 않고 네 자손이라는 단수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 받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3장에 보면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땅(15절)과 자손, 즉 씨에 대한 약속(16절)인데 그 땅에 대한 약속은 다윗 시대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땅도 결국 지상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에 대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오늘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란 그 씨,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의롭다 함을 받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8:56-59)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여기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런 말을 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아마도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로는 예수님이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런 유대인들의 아비가 마귀라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확실하게 드러났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다가 자신들의 율법의 행위를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어떤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창세기 15장에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15:9-10)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15:17)고 합니다.
그 당시의 언약은 짐승을 쪼개어 언약의 두 당사자가 쪼개진 짐승사이로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기 쪼개어진 고기는 아브람의 자손들(믿는 자들)에게 가나안 땅(천국)을 보장해 주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이 언약 당사자인 아브람과 하나님, 양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라는 점입니다. 언약의 두 당사자 중에 아브람은 구경만 하고, 하나님께서는 타는 횃불의 모습으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언약이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모든 언약은 본질적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며. 이러한 언약을 일방적인 언약이라고 합니다. 짐승을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는 피의 언약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시고 이러한 언약을 체결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언약을 이루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고 하여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증거인 것입니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하여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하시는데 왜 굳이 율법을 주셨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 17절부터 보면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갈3:17-18)고 합니다.
사람의 언약도 함부로 폐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때로부터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에 보면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고 합니다.
여기 보면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외국에서 객이 되었다가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하시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 들어가서 나온 기간이 430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지만 이 율법이 주어졌다고 이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이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유업이나 영원한 생명과 아들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받는 것은, 율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왜 주어진 것입니까?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고 합니다. 범법함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죄로 심히 죄가 되도록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인간이 죄 아래 갇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율법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어떠한 법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에서 오늘 본문이 2천년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받은 율법의 언약은 상호언약입니다. 율법서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입니다. 역시 목숨을 건 언약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즉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로만 구원이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율법이 들어있는 것은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드디어 약속의 자손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그 약속의 자손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보여주는 인간의 죄악 된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율법이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죄인을 가두어 두었다가 약속의 자손인 예수님께 조용하게 인수인계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율법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결국 약속의 자손을 죽임으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지를 다 드러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인간은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기의 공로와 자기 행위의 가치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드러난 것입니다.
4. 주의 은혜로만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갈3:20)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짧은 말씀이지만 참 난해한 구절이라 그 해석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율법은 중보에 의하여 전달된 반면 약속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약속의 직접적인 전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언약 체결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하는 것이 아니고 양편을 위하여야 하는데 모세가 율법을 받아와서 양편에 피를 뿌렸습니다. 어기는 쪽이 다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의 약속은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일방성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일방적으로 이루어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자신이 이루어내심을 보여주신다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분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인 언약을 하신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상호언약을 체결하신 것은 왜 인간이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만으로 구원을 받는지를 보여주시는 조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21절에 보면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3:21)고 합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율법이 살게 하는 법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을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구원의 언약을 일방적인 언약이 아닌 상호언약으로 약속이 주어졌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즉, 왜 일방적인 약속을 하셔야만 했는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 상호언약인 율법을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3:22)고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 말씀의 더욱 확실한 이해를 위하여 로마서 11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라고 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와 불순종아래 가두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자신이 죄 아래 갇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서 받게 되었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만들어낼 열매이며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를 바르게 알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