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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본문 / 5:16-18

 

1. 신앙과 종교

우리는 지난주에 진정한 자유와 종노릇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말씀을 들은 우린 지난 한 주 동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사셨습니까? 일일이 대답할 수 없으니 제가 몇 가지 예측하여 말하여 보겠습니다.

첫째 말씀 듣고 예배당 나가는 순간 코로나와 뜨거운 태양 볕에 제정신이 들어서 말씀은 다 잊어버렸다. 둘째 내가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다. 셋째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일이 늘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일어났다. 넷째 늘 사랑으로 종노릇 하였다. 이 물음에 우리는 몇 번에 체크 하실 수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이 1번이고, 아주 소수가 2번이고, 거의 없는 것이 3번일 것입니다. 4번은 접근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교 시작부터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가 하시겠지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우리의 육체의 소욕이 싫어하기에 이런 복잡한 경우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 갈라디아서 513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고 합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는 율법적인 접근이 있습니다. 바로 옛 언약의 방식인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첫째와 같은 방법은 유대인들이 실패하였기에 이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거듭난 양심과 이성을 따라서 이런 모든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에 거듭난 내가 주체가 되어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부족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령은 가만히 계시다가 도와달라고 할 때만 도와주는 도우미의 역할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인이라 부르는 예수님이 주체가 아닌 내가 주체가 되고 도리어 주인이신 예수님은 조력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육체의 욕심

두 가지 다 결국 어떤 결론으로 나오는가 하면 자기 육체의 자랑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자랑이란 자기 영광을 말합니다. 늘 본문 16절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뒤에 19절부터 보면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19-21)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육체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우리가 거의 알 수 있고 그래서 걸러낼 수도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육체의 소욕이란 이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아주 고차원의 내용들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참으로 경건해 보이고 또 신령해 보이지만 그것도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육체의 욕심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과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이 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자 하는 결과는 반드시 자기 영광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그렇게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히 대단한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고 합니다. 이 말씀 앞뒤를 보시면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보고 지킨다고 하지만 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서로 영광을 취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들은 에수님을 믿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란 이야기이며 또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라서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와 공로가 아니면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믿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이 일절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사람들의 열심을 촉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목회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많이 가집니다.

그래서 무엇을 추가하는가 하면 이제 예수 믿고 나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옛날 율법 시대에 못하던 것을 이제 거듭난 우리는 이루어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육체의 욕심이 되는지를 방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경우를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자기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말로서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526절부터 보면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5:25-26)고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인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영광이란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서로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느라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서 거듭났다고 말은 하지만 거듭난 나의 자아를 꾸미고 치장하는 일에 얼마든지 성경을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 중에 제사법 같은 것은 폐기되었지만 시민법과 도덕법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이 신자들의 개인적인 구원에 근거가 된다고 하는 신율법주의도 나오고, 금욕주의도 나오고, 신비주의도 나오고, 심지어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가꾸는 또 다른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교회들마다 온갖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들을 추구하지만 과연 그 영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에 못 박하신 아들에게 무릎을 꿇는 영광입니까? 자기의 이름은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의 이름만이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만 갖다 부치고 그 속내는 자기의 영광입니까?

유대인들이 잘못된 하나님의 영광 관으로 참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이 오늘날도 인간들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방송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오고 또 듣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홈페이지에 설교를 올리기에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연락이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저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결국 무엇에 관심이 갑니까? 나의 이름과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홈페이지를 폐쇄해야 합니다. 본질적인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은 없고 나의 이름과 영광에만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신혼집에 가면 필수적으로 하는 게 결혼 앨범을 보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사진도 보지만 중요한 것은 단체 사진의 구석진 자리에 보일 듯 말듯한 자기가 잘 나왔는지 아닌지 그것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만 잘 나오면 되는데 정작 본인들은 자기 사진만 봅니다. 자기가 잘 나왔으면 사진 잘 찍은 것이고, 이상하게 나왔다고 여기면 사진사 실력을 탓하는 겁니다. 진짜 주인공이 바뀐 것입니다.

가톨릭 전통인 교회력을 따라 설교를 하게 되면 예수님의 공생애와 맞추어서 절기처럼 지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사순절이 있습니다. 사십 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흔히 말하는 것처럼 경건하게 지내는 것인데 예전에는 그 기간에는 고기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톨릭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기독교화 시키기 위하여 이방인들의 축제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축제에 기독교적인 색을 입힌 것인데 원래 카니발은 라틴어의 카르네 발레(carne vale:고기여, 그만)가 어원입니다.

그런데 사순절, 즉 앞으로 40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아야 되니 그 전에 집안에 남은 고기를 다 처분하기 위하여 마음껏 고기를 먹고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카니발이라고 하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먹고 마시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이 금욕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눌러놓으면 다른 욕구로 분출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본질은 오간데 없고 그냥 비본질적인 것에 매여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적인 삶인 것입니다.

로새서 2장에 보면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20-23)고 합니다.

세상의 초등학문, 사람의 명과 가르침들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23절에서 자의적 숭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의적 숭배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여 만들어낸 하나님 숭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스스로 만들어낸 온갖 규칙과 법들인 것입니다. 자의적인 숭배를 하는 것으로 겸손도 사람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금식과 철야와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데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 육체의 욕심을 없애는 지혜로운 모양 같지만 그러나 육체를 따라는 것을 금하는데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말은 그렇게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금욕을 통하여 육체의 욕심인 자기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결국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입신양명, 즉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의 원리인데 이런 세상의 원리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는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서는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사람들의 자기 영광 챙기기로 나가는 것입니다.

찬송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고 합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서 아간이 돌 맞아 죽은 그런 골짜기로 가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을 따라 행함

그러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약의 책이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께 성령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그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신 것입니다.

단 한 번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간구를 하셨지만 그러나 결국은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8-15)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 성령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이 임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 반드시 누구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까?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예수님께 한량없이 부어주셔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서 십자가에 죽기 까기 복종하게 하시는 길로 가신 것처럼 오늘날도 자기 백성들에 성령을 부어주시면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하늘에 앉혀진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받은 이후부터는 이제 자기 이름의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내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계속하여 자기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항상 육체의 소욕보다 성령의 소욕이 더 강하고 영원하시기에 자기 백성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기 영광인 아들의 이름을 드러내게 됩니다. 성경은 이 과정을 고난 또는 환난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이지만 그 속에서 자기를 의지하려고 하는 육체의 욕심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시는데 어느 정도로 주시는 것입니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제 나는 죽었다는 말이 날마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이 다만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따라 행하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에게서, 바울에게서 이런 모습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즉 자기의 일체의 가능성과 행위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 다시 말해 자기의 가능성과 행위를 의지하는 일에는 반드시 자기 이름의 영광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7절부터 보면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5:17-18)고 합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충돌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믿게 만드는 일인데, 육체의 소욕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은 오직 자기 자원으로만 살아가는 죄악의 근원된 모습이 우리의 살과 뼈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며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며 또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이런 주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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