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 히브리서 25. ( 히7:1-3)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by 관리자 posted Apr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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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본문 / 7: 1- 3 


1. 위로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맹세하시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큰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신다는 것은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스스로 보존하고 수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확고한지는 지난주 본문인 16절부터 보면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6:17-18)라고 하는 말씀에서 이미 확인을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위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항상 연약함만을 보게 됩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천국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자임을 자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까지 거짓된 것이 아닐까 의심해야 할 정도로 우리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력으로는 천국은 어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약속하시고 맹세로 보증까지 하셨다는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든든한 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를 보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에 있어서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에는 그리스도로 인한 핍박과 어려움이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신자를 향해 쓰여진 것입니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향한 세상의 위로는 조금만 참으면 다 잘될 것이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을 것이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다는 수준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세상이 주는 위로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시 이런 수준의 위로를 남발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복으로 바꿔 주신다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그러한 위로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중지됨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가 어떤 처지에서 어떤 반응을 하든 하나님의 맹세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멜기세덱 제사장을 등장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아브람의 십일조

우선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겐 무척 생소합니다. 멜기세덱은 자주 언급된 인물이 아니라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편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잠깐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상으로는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7:1)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에서 제사장은 왕을 겸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왕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기대하거나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오셔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두고 7절에서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7:7)고 말씀한 대로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빔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도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7:4)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멜기세덱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같이 하는 것은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예수님의 우월성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예수님이 높으신 분이고, 우월하신 분임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리가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믿는다면, 한 가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믿는 것처럼,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아니 그 전에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오늘 본문 2절의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7:2)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번역하니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 멜기세덱이 빌어준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의의 왕이기에 의를 선물을 주는 것이며, 살렘의 왕이기에 평강을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기에 인간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 수 없을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에게는 참된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의 왕이 오셔서 의를 선물로 주시면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그 결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왕 살렘의 왕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나서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하여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먼저 떡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떡과 포도주를 준비한 내용은 인용을 하지 않고 있지만 창세기에서는 멜기세덱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조차 멜기세덱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하러 갔는데 작은 사병으로 연합군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챙겨서 오는 중입니다. 그 전쟁의 승리가 자기의 능력과 실력이 아니었음을 멜기세덱을 만남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것은, 이것은 내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임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즉 탈취물은 아브라함의 실력의 대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4:18-20)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승리는 여기 19절의 말씀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붙여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내용을 알지고 못하고 싸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붙이신 전쟁이었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자기의 승리가 높으신 분의 축복으로 된 것임을 알고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여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통하여 자신의 승리가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복이 주어지는 그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어떠한 자질과 조건이 아님을 밝히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인물이 투입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물을 묵시적 인물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 인물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멜기세덱인 것입니다.

 

3. 멜기세덱

그런 멜기세덱은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7:3)고 합니다.

앞에 2절에서는 멜기세덱을 의의 왕, 평강의 왕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의와 평강이 멜기세덱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의와 평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3절에서는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다고 말씀합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부터 일방적인 축복을 받는 것처럼 오늘날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을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노력과 애씀과 십일조를 함으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거저주시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거저주시는 것으로 믿으십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한 것을 보니 너희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자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이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늘 내 중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자기 의가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의를 의지하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세상의 어떤 의보다 우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믿는 그 믿음은 우리의 모든 의에 대해서 눈길을 돌리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열심도 행함도 높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우월하신 의로움이 나를 살렸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높으신 분이라고 아무리 떠든다고 해도 인간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고 가치있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하시고 높으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의와 평강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나눔 받은 의로 인해 영원한 평강의 나라에 거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주님만 믿고 의지하기를 소원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높이는 신자인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로 신자된 우리가 주를 높임은 다른 어떤 노력과 행위로가 아닌 오직 주의 은혜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 언약이 우리를 의의 사람 되게 하셨고 또 평강을 누리는 사람으로 세우셨음을 알아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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