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 히브리서 31. (히 8:6-13) 두 언약 이야기

by 관리자 posted Jun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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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두 언약 이야기

본문 / 8: 6-13

 

1. 저자의 의도

히브리서는 구약의 내용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구약의 것, 즉 그림자를 보지 말고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해 쓴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구약의 의식적인 것들을 행하는 것이 더 분명한 신앙이 아닌가 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의식들과 종교적인 행위들이 없을 때 그런 행위가 있는 사람들에 비해 종교적인 행위가 없는 자신들을 보며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착각과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는 행위가 있어야 신앙이 분명하고 또 확실해진다는 생각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런 우리들을 향해 기록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약으로는 안 되고, 예수님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제사장 이야기를 기록한 것도, 믿어야 할 분은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지,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레위계통의 제사장은 자신의 죄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로도, 절기로도 또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과 오직 예수님으로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구약의 이야기를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것들은 결국 하늘의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또 기다리기 위함이지 그것을 신뢰하고 믿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이야기에서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언약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제사장에 대한 내용과 동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두 계통의 제사장이 등장하는 것처럼 언약에도 두 언약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언약을 등장시켜서 이것으로는 안되고 이것으로만 된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언약

늘 본문 6절부터 보면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8:6-8)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첫 언약을 말하고 또 둘째 언약을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 언약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7절에 보면 첫 언약이 무흠하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무흠하지 못한 첫째 언약이 아닌 무흠한 둘째 언약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언약은 옛 언약이라고도 하고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둘째 언약은 새 언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워진 새로운 법을 뜻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라는 의미는 내용의 새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를 말한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3:17-18)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구약의 율법을 말씀하며, 그 앞에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 창세기 15장에 보면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5:12-21)고 합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쪼갠 고기 사이로 함께 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타는 횃불의 모양으로 지나가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특징은 14절의 내가하겠다는 것이며 또 18절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처음 시작인 창세기 12장에도 보면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고 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12:4)라고 말씀합니다.

처럼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 즉 하나님이 약속 하신대로 행하시는 언약이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배반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언약은 다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1-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시내산 언약은 일방언약이 아니라, 쌍방언약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를 전하고 낭독할 때마다 백성들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제단과 백성 모두에게 뿌림으로 이 언약이 쌍방간에 지켜야할 언약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새 언약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0절 이하에서 인용한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1-33)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법이 이스라엘의 밖에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의 속, 즉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으로 새롭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둘째 언약입니다.

즉 첫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였지만, 둘째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살아계셔서 그들을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확실성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하실 때 이루십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7-28)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리고 이 새 언약에 대하여 인간이 할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 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같은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우리에게 지키라는 말씀이 아닌,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아는 것이며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왕 실패할 첫 언약, 즉 옛 언약인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실패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온전케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윤리, 도덕 수준의 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을 앞세워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나, 행함을 신앙 그 자체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둘째 언약 아래 있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첫 언약이며, 옛 언약인 모세의 율법은 결국은 왜 새 언약으로만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왜 은혜로만 구원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자들입니다. 그냥 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말로만 은혜를 외치는 자들이 아닌 분명하게 말씀을 경험한 자로서 알며, 고백하며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3. 구원의 근거

그럼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우리의 행함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의 행위입니까? 우리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라 해도 무익한 것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무익한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주님의 일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할지라도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도 잘 지켜야 그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 믿음을 진짜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믿음만으로는 믿을 수 없고, 보이는 행함이 있어야 믿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은 못 믿겠다고 하는 불신앙일 뿐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음을 믿습니다는 것으로 이미 그의 믿음은 확인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믿는 자의 열심과 행함이 개입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천과 노력과 행함으로 신앙을 가득 채우고 또 그렇게 채워 왔던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자를 때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그 허전함까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8-29)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왜 나는 안되고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만을 믿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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