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언약의 피와 유언
본문 / 히 9:16-22
1. 믿음에 대한 착각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온전함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분이 얼마나 온전한가를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다른 것을 믿을 수가 없기에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능력과 실력만을 믿고 살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교회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로 믿음의 유무를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가 행한 일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행하신 일의 정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 즉 피 흘리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떻게 하여야 영생 얻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까?’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가 외치고 있는 내용이라고 믿기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믿는 것이 곧 십자가를 믿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은 분명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십자가를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 신자라 할 수 없고 구원받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게 되는데 있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고민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십자가를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가 고민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십자가는 여러 가지의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주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가 뜻하고 있고, 목표하고 있고, 소원하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또 신자로서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내 자신의 소원과 욕심을 포기하지 않은 채 십자가를 외치는 것은 거짓임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십자가의 길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크나큰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고, 사실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고민과 갈등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십자가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주 쉽게 받아들이고 믿는 있는 분들을 보면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고, 저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기에 이리도 차이가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려지는 결론은 ‘우리에게 걸림이 될 만한 부분을 모두 빼 버린 십자가이기에 그럴 수 있겠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나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너는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네가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존재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외쳐지는 이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이라는 외침만 들으려고 함으로써 자신의 악함은 외면한 채 십자가만 말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외치는 예수님의 피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의 소리를 듣지 못함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무작정 ‘믿자. 믿습니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주님의 외침을 들으며 믿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는 예수 믿고 있다’라는 답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나는 상관없음’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신자는 항상 자신이 믿음 없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고 주님께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라야만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피 뿌림
오늘 본문에 보면 ‘피’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는 마치 통달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주의 깊게 생각하고 묵상해야 할 문제가 바로 ‘예수님의 피’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해 잘 알고 통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을 안다고도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피가 중심이 아니며 그 관심 또한 그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부터 보면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18-22)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당연히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두루마리와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와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24:3-7)고 말합니다.
피를 단에도 뿌리고 백성에게도 뿌려서 언약을 체결합니다. 나중에 장막을 만들고 나서는 장막에도 피를 뿌려 정결케 하였습니다. 피 뿌림으로 정결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에도 피 흘림으로 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도 피 없이 세운 언약이 아니라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짐승의 피로 속죄를 하였지만 짐승의 피는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참된 속죄의 모형과 그림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럼 모세는 그 다음에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들은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되겠습니까?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 잘 하셨습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하는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이어지는 8절에 보면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고 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입니다. 여기 보면 언약서에 피를 뿌렸다는 내용은 없지만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유언
그런데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히9:16-17)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오늘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언약의 능력입니다. 유언의 능력인 것입니다. 피로 세운 언약, 피로 세운 유언의 능력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의 유언 덕분에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게 된 것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유언으로 인하여 우리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상속을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입니다. 그러니 상속은커녕 진노만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이 나타나서 그 언약대로 이루어 내셨기에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잔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의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바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2장에도 보면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온전하게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 피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 그 피의 속죄의 능력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보혈의 능력이며 그 능력이 유언으로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유언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고 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사람의 피와 땀에 의하여 세워질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온전하게 증거되도록 교회 가운데 감독자를 세운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의 수나 건물의 유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세워진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흔들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은 기념하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공로가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어느 정도로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까?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1-28)고 합니다.
여기 주님께 ‘네 믿음이 크다’는 인정을 받은 여인은 가나안 여인, 즉 이방 여인으로 자신을 개와 같은 자임을 인정한 여인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주의 긍휼과 자비를 입을 하등의 자격이 없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그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자세가 주님 앞에서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 아니라 유언을 하신 분의 선택과 그 유언하신 분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언이 되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지금도 속죄가 일어나고, 지금도 중보가 계속되며,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그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치는 것이 설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