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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신자답게 사는 길

성경 /  요17:18


우리는 믿음을 가진 신자라 하지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과 관계없는 것들을 목표와 생활의 원리로 삼고 사는지 모릅니다. 사실 신자의 길은 믿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이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은 우리 자신이 결정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다듬어지고 만들어서 쌓아 온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 자기 길로만 가며 딴 생각을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권하사 어느 날 보면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이 먹는 것을 애쓰지 않더라도 나이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키우시며 자라게 하심으로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하나님의 이 같은 은혜의 단면을 중심으로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웃 사랑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었듯이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심으로써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시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말아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셨기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셨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알면 우리의 인생과 삶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쪽으로 좀 더 가깝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오셨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오심은 우리가 요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며, 그 아버지의 뜻은 우리 인생을 향한 목적과 계획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인간을 만드실 때에 그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입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4-40)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죄가 들어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들어온 죄란 분리의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다른 모든 사람을 자기의 신하로 부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죄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이상 모이면 화합하고 함께 하는 일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부작용과 분리의 아픔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둘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둘이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못되며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25-37) 이 이야기는 한 율법사가 질문한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어디까지 사랑해야 될지 범위를 정해 주십시오'라는 요구에 대해 나온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되어 같은 민족이면서도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러다 북 왕조는 앗수르에게, 남 왕조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남 왕조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말살시키고 그 민족성을 없애기 위해 귀족들을 다 잡아가고 평민들만 남겨 놓습니다. 특별히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는데 그것도 이웃의 이방 족속들을 이주시켜 혼혈족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국가를 재건할 때에 혼혈이 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기 민족에서 제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과 같이 개, 돼지 취급하고 그들을 미워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로 통과하여 지나가면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며칠이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땅을 밟지 않고 돌아 갈 정도로 그 차별과 멸시가 심했습니다. 이 같은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가장 당연히 돌봐 주어야 할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목사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 즉 3-4대의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많은 목사를 배출시킨 뼈대 있는 신앙의 가문의 사람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 멸시와 천대의 대명사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생명을 건지게 해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 쪽에서 볼 때에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이웃이겠느냐?'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옳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답이 질문하고 다르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은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되는 대상입니까?'를 물은 것인데, 대답은 '강도 만난 사람 쪽에서 볼 때에 누가 이웃이었겠느냐?'고 되물으심으로 어디까지 이웃인가 하는 선을 그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 자로 있어야 이웃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선택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찾아 오셨듯이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고 죽음이 있는 저들에게 찾아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의 모든 환경, 즉 직장과 가정으로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이기고, 당연히 복을 받고,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신자고 저쪽은 신자가 아니라는 벽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은혜를 입은 자이고, 저쪽은 아직 은혜를 입지 않은 자라는 구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 쪽도 은혜 입으면 나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 자이니까 잘 난 자이고, 너는 안 믿는 자이니 죽어 마땅하다는 사고방식보다 엉터리도 없습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신앙을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화라는 껍질에만 집착하는 바리새적인 길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2. 신앙 = 순종

그러면 무엇이 신앙입니까?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됩니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에 어느 날 사무엘이 와서 '가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진멸하되 남녀노소를 아끼지 말고 죽이십시오. 유아는 물론 모든 가축까지도 다 죽이시고 하나도 살려 두지 마십시오.' 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서 다 진멸하는 중에 살찌고 좋은 가축들을 남겼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와서 묻습니다. '왜 다 죽이라고 했는데 남겼습니까?' 사울의 대답이 그럴 듯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남겼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그러므로 참 신앙이란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므로 조물주 되신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 아래 절대 복종할 때에 참 가치와 삶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겸손으로 자기를 비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것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라고 몸부림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관한 한 믿지 않고 오직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에만 관심할 뿐입니다. 그러니 대충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방법이나 도구나 기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앎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므로 기독교는 이루어져 나갑니다. 마치 큰 배를 만들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어느 부분에 쓰일지 감이 잘 잡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붙여 놓아 보아야 드디어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천국에 가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순종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일

그런데 여기서 그 순종이 제사와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예배를 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도 한번 하고는 기고만장하고, 크게 헌금 한번 하고는 얼마나 마음이 떳떳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어리석음이 다른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 이루어 내었다는 자신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되고 틀렸다고 찍어내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6장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4-6) 여기서 제사 대신에 인애를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인애란 사랑과 기다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이 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 인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뭔가 하나 만들어서 꺼내 놓는다고 하여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마땅히 취하여야 할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같은 사랑을 바로 깨닫고 체험한 성도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기다릴 수 있게 되며 양보할 수 있게 되며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사람으로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따르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늠름하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부족함과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역 이전에는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심판하기 이전에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판단하여 이웃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들에게 필요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웃에게 필요한 자가 되는 그 범위가 바로 온 세상입니다. 성도는 온 세상의 범죄와 온 세상의 궁핍과 슬픔들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들을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같은 어두움에 우리가 빛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보내심을 받기 위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여자의 몸에서 나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이 세대와 환경과 가정과 직장으로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의 죽음의 직면한 인생들에게 무슨 거창한 결단을 내리고 가기 이전에 내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과 이 시대에 사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나 자녀와 형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우리는 거기에 보냄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듯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 되시며, 우리의 주인 되심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마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말보다 더 강력한 것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힘이 세상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우리의 일터와 생활 현장에서 생생하고 놀랍게 드러내며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제일 힘든 사람은 바로 우리 가장 가까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어려운 대상이 아내와 자식들과 가족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틀리면 안 보면 되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신자들은 영적인 차원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기에 더 더욱 힘이 듭니다. 자녀들도 영적인 차원에서 바로 길러 내어야 하고, 부부도 영적인 차원에서 완성되기 까지 서로 애써야 되며, 부모, 친척, 이웃 등 모두 앞에서 우리 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신자만 아니었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흠이 되지 않겠는데 예수 이름을 어깨에 단 이상 마음대로 처신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친척, 이웃 그 모든 것이 우리들의 일이요, 사명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더 없이 우리의 신앙이 적음을 깨닫고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반대하던 사람이 변화 되고 친척과 이웃들이 한 사람씩 돌아오는 것을 우리가 목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사는 생활 속에서 가장 평범한 신앙의 사명이 있으며,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당하는 그 일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웃 앞에 우리는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이웃 노릇을 하십시오. '저 사람은 이상해? 저 사람은 남이 보든 안 보든 정직하게 살아. 저 사람은 뭔가 달라?' 그렇게 평가 받으십시오. 사회가 타락하고 경제가 불안하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로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지 않으며 또 세상에서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서 예수 믿는 것이 훨씬 어려워 졌습니다. 편해지니까 사람들이 대강 믿는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깨어 기도하며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받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을 뿐만 아니라 오늘 신자답게 사는 것으로 무장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하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이웃들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로 그 역할을 다 해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죄로 인해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과 성경이 말씀하는 이웃 사랑은 무엇입니까?

3. 참 신앙은 무엇이며, 그 참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이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5.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자로서의 영적인 책임과 일은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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