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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세상에서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

성경 / 요17:18

 

우리는 이 땅에서 신자로 부르심을 입은 이후로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신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일군의 자격

오늘 본문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이해를 위해 그 앞의 말씀을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6-17)라고 하시고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시면서도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에 세상의 것으로 무장해서는 안 되는 자들이고, 보내신 이가 일을 맡겨서 세상에 보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목표로 하는 자가 아닌 다른 것을 맡은 자이기에 우리가 세상에서의 싸움도 세상의 것으로 무기 삼아 싸우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싸우라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가장 정신 차리고 분별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기독교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 땅에 사는 자라면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불신자들은 그 목표를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려는 자라면, 신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나 방법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신불 간에 차이가 없는데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자는 하나님이라는 백을 하나 더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불신자처럼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기적과 만사가 형통해지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간섭을 받는 것을 신자의 믿음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도 신앙의 초보를 벗어버리지 못한 신자입니다. 신자 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속과 무장이 다른 사람이요, 살아가는 방법과 내용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세상을 이기는 무장을 해야 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목표를 위해 무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 된 우리는 '신자인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며 또 신자는 세상 것으로 무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입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는데 그 생애를 40년씩 3기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첫 40년은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로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과 환경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40년은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보냈고,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민족의 지도자로 그 민족을 구원해 내는 위대한 영웅으로서의 생애를 장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지막 40년을 사용하시기 위해 바로의 궁과 미디안 광야에서 80년이라는 세월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확인시키시고 쓰셨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40년 동안 바로의 궁에서 최고의 공부를 시키신 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이십니다. 왕궁에서 왕자 수업을 40년이나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기껏 애굽 관원 하나를 죽이는 것 밖에는 효과를 못 내었습니다. 그 모든 실력이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을 가서 이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 폐인으로 자처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의 호령에 움직일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보냅니다. 그렇게 80세의 늙은 몸이 되어 이제는 아무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는 도무지 자격이 없습니다. 그럴 실력도 없습니다.'라는 핑계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합니다. 거기에는 40년 전 혈기왕성할 때 부르시지 왜 이제 부르시냐는 원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어떤 것으로도 일하지 않으심을 가장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우리가 왕자라는 좋은 조건이라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광야에서 80세의 노구로 목동 일을 하는 자로 이제는 아무런 힘도 없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똑똑하게 여기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지 모릅니다. 승승장구할 때는 무슨 일에라도 자신감이 넘치고, 반대로 나이 들어 건강과 재물과 명예를 잃었을 때는 너무나 쉽게 주저 앉아버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이 모세를 다루시는 섭리를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앞에서 그 뜻을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란 바로 모세와 같이 자만의 산을 넘고 자포자기의 수렁을 빠져 나온 연후에 비로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2. 무장

지금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저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닌 하늘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진리로 무장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삶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은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냄을 받은 자들로, 신자는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사람들에게 '저 사람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무장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대중가요로부터 시작해서 TV 드라마의 대부분의 주제로 등장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라는 말처럼 그 고귀한 내용과 값어치가 희석되어 오해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누구를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사랑 이야기는 맹목적인 기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그렇게 설명한 예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도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 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4:14-21) 지난 주 말씀처럼 성경의 주제를 압축하면,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설명할 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랑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당연한 열매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수평적인 이웃사랑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차원에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란 요한일서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할 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으로 인해 이제 사랑을 알게 된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표현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6-31)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분쟁과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예수파라고 하는 파벌이 생긴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파벌이 생기는 것은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는 적어도 바울에게서 배웠으니, 아볼로에게서 배운 너희 보다는 낫다는 식이었습니다. 서울대학 나오면 훨씬 낫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문제에서도 똑같이 통용되리라고 생각하는 데서 혼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쌓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 같은 생각에 상대방이 항복하지 않아서 다툼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신앙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쌓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디 출신이며, 직업이 무엇이며, 지금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시험이 되거든 아직도 내 신앙이 부족하다고 여기셔야지,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로 시험에 드는 것은 우리가 아직 신앙의 초보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세상일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게 주신 것으로 자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기에 계속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는 지금에 만족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에 도달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무장이고 만일 이것이 잘 안된다면 기도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3. 더 깊은 신앙으로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0-13)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이 땅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구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이해는 영적으로 12개월 미만일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는 로마의 감옥에서 많은 고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필요한 위문품을 가지고 바울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이 같은 사랑과 정성을 받으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대로라면 능력 주시는 자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우선 감옥에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로서는 바울의 이런 말씀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바울의 요지는 우리가 무엇으로 무장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위문품을 가지고 온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이것을 내가 기뻐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서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고 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는 이 길은 세상의 것으로 힘과 기초를 삼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가는 길은 세상 것으로 가는 길이 아니므로 아무리 세상에서의 자유와 배부른 것을 빼앗더라도 그것으로 이 길이 방해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혔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위한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항상 후렴처럼 나오는 말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매였으나 복음은 메이지 아니하고, 나를 때리거나 막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막을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이 무장한 무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우리를 괴롭힐 때 쉽게 무너져 버린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하늘의 무기와 능력으로 살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자다운 신자란, 그의 가정과 그가 다니는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세상의 것으로 힘과 자랑과 목표로 삼고 사는 자가 아님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세상에 빛과 향기로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듯이 우리들도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 앞에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저 사람은 사귀면 사귈수록 뭔가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의 고생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당했어도 세상이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이런 고생 끝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돼야 하지만 바울은 이런 고생을 해서 드디어 감옥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란, 어떤 일도 이제 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자가 되고나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방법과 길로 인도하더라도 능히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감격과 항복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의 신앙은 나는 예수님 잘 믿고는 싶은데 그 다음의 신앙의 깊은 자리에 들어가는 데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하고, 건축헌금을 내랄까봐 겁이 나고, 내 쉬는 시간을 빼앗아 봉사하자고 할까봐 겁이 나서 더 깊이 발을 들여 놓지 않으려 합니다. 신자가 아니기는 싫은데 진짜 신자도 싫은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제 이런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속이면서 더디 믿고 보류하는 이 미련함을 청산하고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시되 바울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감격과 항복과 순종의 자리에서 따를 것을 원하십니다. 이제 근심과 걱정으로 더디 믿는 신앙을 끝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나고 향기가 발하도록 깊은 신앙의 자리에 발을 디디고 온 몸을 잠그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성도들이 기독교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이 모세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려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웃사랑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4. 교회 가운데 분쟁과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6. 이 세상에서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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