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이 하는 일
본문 / 히11:13-16
1. 믿음으로 사라는
믿음에 대한 보편적인 오해는 신자가 믿음을 소유하여 그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실천하고, 하나님은 그런 나의 실천을 보시고 기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임을 지난 시간 사라의 믿음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라가 잉태했고 그것을 ‘믿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라에게 믿음이 있었다거나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따라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가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인간은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라가 잉태한 것은 사라의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즉 믿음 없는 인간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열심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에서 인간의 열심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으로 사라는’이라는 말 역시, 사라라는 여인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를 붙들어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을 증거하는 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여전히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기 때문임을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다스리고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열심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고 말합니다.
믿음을 인간의 소유적인 측면에서 이 내용을 본다면 어떤 식의 해석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이 있는 신자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것입니다.
아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아버지는 ‘내가 저 아이의 아버지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가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신자로 살자고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초점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믿음 있는 자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믿음에 대한 오해의 결과인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우리가 본향을 사모하며 산다고 합시다.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믿으며 세상을 소망하기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산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그런 믿음을 창출한 것입니까? 우리의 의지며 열심이며 각오인 것이냐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본향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외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본향을 사모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즉 믿음을 소유하여 내가 믿음대로 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다고 해서 내 안의 악한 본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인간에게 믿음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믿음을 줬으니 이제부터 그 믿음으로 신앙생활 잘 해라’고 하셨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믿음을 주신 후에 아무것도 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만 던져주시고는 나머지는 인간에게 맡긴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돌다가 쓰러지는 팽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채찍질을 하는 것처럼, 힘이 떨어지는 신자를 찾아와서 힘을 주시고 채찍질 하는 일만 하나님이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해 자기 백성을 믿음의 세계로 불러들이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그들을 붙드시며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본향을 사모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되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과에 대한 공로를 모두 우리에게 돌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본향을 사모하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실력자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결코 우리가 아닙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무것도 못한 우리를 높여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지 ‘내 믿음’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높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실력에 대해 대단한 착각을 가진 자의 어리석음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참으로 다루기 힘든 완악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드시면서 일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믿음을 가진 자로 뭘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믿음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에 붙들려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위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향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에 있게 되었느냐?’로 향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에게 남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실 만큼 그들이 가치 있는 존재였습니까? 이 역시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 역시 멸망의 자식이며 소멸되어야 할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진심으로 믿음을 아는 것이고, 믿음이 가지고 있는 참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근처에도 못 간 것처럼 엉망으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붙들어 놓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감사와 기쁨과 찬송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이 감사와 기쁨과 찬송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그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만 있는 고백인, 이 고백이 맺어지도록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백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심으로써 세상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곧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외국인과 나그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이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죽는 자들이 있고, 그냥 죽는 자들이 있는데 겉으로 볼 때는 같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죽으면 복 있는 죽음이며 영생의 길이지만, 믿음이 없이 죽으면 영원한 형벌의 길입니다. 그 영생과 영벌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등 이들이 모두 약속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죽은 사람과 다른 삶의 내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따라 죽은 자들은 약속을 바라보고 세상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은 그냥 구름 흘러가듯이 산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방향성이 있는 나그네의 삶인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 한번 드리고서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믿음을 세상이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노아는 이 세상이 심판받아야 마땅한 이유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장막에 살면서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따라 죽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구원이란 어디에서 구원받았느냐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디로의 구원인가도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은 오직 자기 구원이 최종목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하도록 구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른 구원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종살이하던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임과 동시에 그 방향은 가나안땅으로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는 애굽과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그들의 참된 신으로 섬기며 살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나그네라는 것은 가야 할 방향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 삶인데 어디로 가야 하는 나그네인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나라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되는 일이기에 구약에서 믿음을 따라 죽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약속의 실체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장에 보면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3:23-27)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서 들어가지는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구약의 한계를 보이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영원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나라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에 가나안땅은 영원한 약속의 나라에 대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들어가기를 사모하였는데,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땅을 그 후손이 차지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땅이 최종 목표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고서 즐거워하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믿음을 따라 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골로새서 1장에 보면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구원이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이며 그 기업이란 바로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의 방향과 목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3절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여 졌습니다. 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이유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에 자기들의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곳으로 가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증거를 보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11:14)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4. 믿음의 능력
믿음은 신자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온 힘을 다해 봉사하는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신자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합니다. 즉 믿음은 신자를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그가 곧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정착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좀 벌어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외국인처럼 사는 것인데, 믿음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이 아닌 이 땅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살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은 내용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든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땅엣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을 듣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고 합니다.
그것은 여기 말씀대로 하면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살림을 받지 못하였다면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면서 살아가는 모든 활동들이 죽은 자들의 몸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죽은 자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과 흑암의 권세에서 다실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이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일들이 흑암 아래 죽음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만이 위엣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가 거할 곳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신자가 소망하는 것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소망하며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향한 소망이 없다는 증거일 뿐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는 성경의 왜곡으로 이어집니다. 가령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합니다.
이 내용도 믿음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며, 살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니 그 믿음으로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신자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에 항상 은혜와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신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습니다. 은혜와 이 사랑으로 인해 신자는 모든 일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데, 신자가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써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에 있음을 말해주는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시선을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나를 보지 말고 믿음 가운데 불러들이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믿음에 붙들린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며 우리에게 이미도 허락하신 본향을 사모함으로 살아가는 아름답고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