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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거룩의 길과 그 길의 방해 요소들

본문 / 요17: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신분 얻은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서 그 거룩한 신분을 완성시켜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을 완성시키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이야말로 우리가 거룩으로 가는 입구인 동시에 유일한 길입니다. 그 순종들 중에서 특별히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능력과 은사를 가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 했습니다. 이 순종의 길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도 실천되어지는 순종이라야 하는데 그 일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욥입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욥이었기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왜 이런 어려움을 격어야 되는지를 몰랐지만 하나 아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복되게 하려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무엇이 만들어 질 것인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정금같이 단련될 것을 안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말로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별 되지 않기에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과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결국은 다 좋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이것이 구호로만 그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거룩에의 길을 가는 삶의 현장에서 거룩을 추구해야 되는 실제적인 모습과 동시에 거룩에의 길을 방해하는 요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함께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4) 라고 말씀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의 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웃을 사랑해 보면 거기에는 거룩의 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자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서 그냥 상습적으로 하는 말이라는 타성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 거룩의 길에 요구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역으로 살펴보면 좀 더 구체적인 이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1-24)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형제에 대해 노하며, 라가라는 욕을 하지 말라’고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라가’라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이 공용어로 삼고 있던 아람어인데 우리나라 말로 ‘돌 머리, 미련한 자’라는 뜻입니다. 또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종교적 행위에서 보면 최고의 행위이지만 그 보다 선행 되어야할 일이 이웃 사랑 즉 화목이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분을 내고, 이웃을 향해 미련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땅에서 괴로운 관계로 오래토록 지내야 하는 어려움이 가장 큰 곳이 바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회사는 마음에 안 들면 경영주가 해고시키면 되지만 교회는 이단을 따르지 않는 한 쉽게 출교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원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가지고는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일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떠들고, 가는 데마다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분열만 심고 다니면서도, 헌금은 많이 해서 목사 마음까지 사로잡아 버려서 정당하게 봉사하고 싶은 사람들의 기를 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쌓인 게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 저는 저 사람과 같지 않음에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스스로에게는 ‘나는 저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괜찮은 신자인가?’하며 자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틀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순종이라는 말이 곧 바로 거룩에의 길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방해 요소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분명한 기록이 마가복음 2장에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4-17) 예수님은 의원으로서 병든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신자들도 세상 속에서 죄인이고 그래서 죽음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자들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내가 아니면 고침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잘 오해하는 것은 바로 내가 감당해야 될 사람들, 즉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이 죄인이요 병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저들이 내게 도움을 주어야 되는 자들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보기 위해 마태복음 20장입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0-28)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 요구받고 있는 순종의 자리로 순종은 섬기며 종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순종은 하고 싶고, 하나님 앞에 뭔가 큰일을 하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 때문에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무슨 큰일을 행하시거나 역사에 남을 인물을 만들고 싶으시기보다 오히려 내 혈육이나 이웃, 교회 성도들 앞에서 섬기는 자를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종의 실체인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섬김을 받고 자신을 크게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순종의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요구받고 있는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발걸음은 우리에게 있는 어떤 억울함을 달게 받고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에게 건강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돈이 좀 있었더라면, 누가 조금만 더 보살펴 준다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억울함 속에 빠져서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그런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내게 맡겨진 이웃과 혈육들을 섬기는 그것이 참 거룩과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거창한 자선 사업가나 선교사가 되고 싶으나 아직 환경이 여의치 않을 뿐이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 즉 하나님께서는 내게 허락한 나와 가까운 이웃들을 대접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일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입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1-7) 너희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거창하게 떠벌리며 금식하지만, 알맹이를 잊어버린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가까운 이웃 중에 주린 자가 있으면 먹이고, 혈육에게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이것에서부터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지 않고 형제와 싸우고 와서 제사는 잘도 드리고 금식한답시고 겉으로는 요란을 피우지만 실속은 오락을 일삼는 그런 외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과 이웃에 대해 순종을 요구받는 것은, 그 이웃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을 훈련하는 자리입니다. 거룩의 길은 종교적인 어떤 멋있는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친척과 이웃 앞에서 순종하여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1:12-17) 바울이 옥에 갇히자 바울을 시기하던 자들이 바울을 약 올리며 괴로움을 더하게 하기 위해 안 하던 전도의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셨으므로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바울은 가짜니까 저렇게 옥에 잡아 가두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고 합니다. 결국 이 싸움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데 겉으론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어떤 환경이나 조건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가 처해 있는 이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우리에게는 오직 이와 같은 목표만이 있을 뿐입니다.

 

3. 거룩의 길과 훈련

바울의 이런 고백에 대한 이유가 다음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나 좀 빨리 고통과 아픔이 없는 그 나라에 데려가 주시면 좋겠다는 유혹과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입장에서 ‘내가 지금 괴로우나 살아 있는 것은 너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노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의 살아 있는 목적이요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니까 혹시 난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명을 남기려는 것은 아닌지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린 아직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도 못한 것이며 아직 시작도 못한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늘 딴 것만 달라다가 매 맞고 돌아와서 상처가 아물 만하면 또 딴것 달라고 하는 이런 일의 연속이라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노라’는 이 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진정한 신자인지 점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이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풀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결론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19-22) 이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은 율법 있는 자에게 가면 자기도 율법 있는 자같이, 없는 자에게 가면 없는 자같이 했답니다. 이것은 그가 싸울 필요가 없는 것 가지고는 절대 안 싸우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것 가지고는 싸울 일이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람들을 대하여 섬기는 자세였으며, 거룩의 길을 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으며 그 복음을 위해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자세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바로 장점을 보려고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싸움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문제로 이웃을 섬기려고 하지 않는 한 십자가를 질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키지 않는 이웃을 섬겨 보십시오. 그러면 십자가를 지는 싸움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싸움에 들어가면, ‘내가 왜 욕을 먹으며 살아야 돼’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 자연인의 심성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 제자가 스승을 팔아먹었습니다. 주님은 미리부터 그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묵묵히 당하십니다. 이것이 거룩에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르겠노라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당장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싫어 그 거룩의 길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가정과 형제, 내 친구와 이웃 그리고 교회가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십자가고 거룩에의 길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고치시는 의원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환자가 비명을 지르고 의사를 욕하면 의사는 자기를 욕하는 것이라고 듣지 않습니다. 아파서 그런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그것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에의 길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 길을 걸으셨고 또한 우리들에게도 그 길을 갈 것을 요구하시며 그것이 거룩에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함이니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주를 찾아 예배하러 나온 모든 사람들은 병자들입니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살려내는 것이요, 치료하는 것이요, 은혜입니다. 그들을 업으며, 찾아가며, 살려내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왜 그것밖에 안되느냐 하기 전에 나의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사역을 위해 제사장적 사명을 받은 자들로 연약한 자들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일을 감수하리라 결심하고 이 신앙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먼데서 찾으실 것이 아니라 우리 옆에 그 대상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며, 내 몸과 같이 섬기는가를 보십시오. 이제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자존심을 죽이고 자기를 죽여서 묵묵히 섬기는 자리에 서시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도 욥이 가졌던 순종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2.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거룩의 길을 가는 데 방해되는 오해들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전도를 바울을 괴롭게 또는 진정으로 하든 상관없이 바울이 가졌던 신앙은 무엇입니까?

5. 바울이 가졌던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거룩으로 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사는 동안 받아야 하는 신앙과 거룩의 훈련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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