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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저희 말을 인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

본문 / 요17:20

 

요한복음 17장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이 이미 이루신 것과 장차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제자들이 알기 원하는 내용들을 기도 형식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고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모든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확인하려는 것은 ‘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왜 ‘저희 말을 인하여’라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게 되는 방법을 왜 말로 정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말보다 기적과 능력으로 하면 훨씬 잘 믿을 것 같은데 왜 말로 정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1. 하나님의 일하심

이것은 결국 신앙이란 결코 방법적인 문제나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신앙 하면 능력과 기적부터 떠 올리는 것입니다. 또한 불신자들은 ‘예수를 믿으나 부처를 믿으나 착하게 살자는 것이니 뭘 믿든 다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분명히 그런 선행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장 잘 넘어지는 유혹중 하나는 ‘나는 정직하게 살았는데 왜 이 모양이고, 도리어 악하게 사는 자들이 더 잘 사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제들을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그와 사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깊은 교제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기독교가 설명 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악한 저들은 잘 살게 하고, 믿음으로 사는 나는 왜 고통의 연속인가?’하는 탄식은 기독교의 핵심이 이 땅에서 공의의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 깊은 인격을 알고 교제케 하기 위함이라는 핵심을 놓쳤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들어갔는가 하는 간증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어떤 업적을 쌓거나 능력적인 방법에 강조점이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강력하게 말씀하는 성경이 호세아 6장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1-6)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은 종교적인 행위가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잘못하여 맞고 찢김을 당했어도 다시 고치시고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도들은 이것을 몰랐기에 신앙의 행위가 신앙의 핵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율법을 지키고 열심히 번제를 올렸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너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선지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지내는 것으로만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처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은 ‘아말렉을 진멸하되 소든 나귀든 어린아이든 노인네든 모든 짐승과 사람들을 남김없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보기에 좋은 소를 남겨서 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좋은 것만 골라서 남겼다.’고 사무엘에게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싫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기독교는 내 생각과 판단과 계획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느냐 하는 종교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을 힘입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을 아는 싸움이고 그분과 사귀는 싸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도 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여기의 사람들은 신앙의 핵심을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으로 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신앙의 핵심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귀며 사랑과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갖지 않고, 종교적인 업적과 행위를 많이 한 것에다 두고 있었기에 물리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과 어떤 업적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짓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업을 이루기보다도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이것을 원하시는구나.’라는 결론을 얻지 못하는 한 어떤 일을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결론을 얻어낼 때까지 계속 어려움이 생기든, 병에 걸리든,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다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동원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어떤 희생을 치루게 해서라도 성취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일을 위해서는 건강도 빼앗을 수 있고, 명예도 빼앗을 수 있고, 반대로 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우리 앞에 있게 할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는 일도, 분당 짓는 일도, 미움 사람이 생기는 일도 혹은 이단이 침투하는 일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런 일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사나 의식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2. 믿음의 확신

요한복음 17장은 결국 이 목표를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결국 이 일을 위해 이 모든 기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모세나 엘리야나 다니엘 같이 어떤 큰일을 위해 보내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을 위해 땅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들로 통해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 17장 2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바로 이 영광을 보는 자리까지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고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그 자리에까지 나아가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으며 그 훈련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개인적 가정적 또는 사업적으로 오기도 하고 교회적인 사건을 통해서도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이 한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의 인격에서 베어 나오는 말이 바로 ‘저희 말을 인하여’에서의 ‘저희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입술의 단순한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혀로써 말한다고 하여 다 말이 아닙니다. 말이란 인격이고 존재여야 하기에 말은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해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오직 이것으로 주님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 속에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의 성품이 나타남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뜻밖에도 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으로만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연결은 이상하게도 순교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그 믿음으로써 말한다는 것입니다. 죽인 자는 가인이고 죽임을 당한 자는 아벨이지만 그 죽음은 오히려 우리가 가진 내용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증거 됩니다. 스데반도 죽었지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져서 죽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증거 되어 왔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에 대하여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3-12:2)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 되심을 체험하되 그 약속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산 증언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의 내용과 근거는 대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의 기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할 때에는 불안해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나는 착하지 못했고, 의롭고, 정직하지 못했다 하는 것으로 불안해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기쁘게 했느냐, 슬프게 했느냐가 아니라 옳았느냐, 옳지 않냐 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았느냐, 옳지 않았느냐 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설 자리를 대치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내가 지켰을 때에는 안심하지만 못 지켰을 때에는 불안이 자신을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옳다 아니다의 싸움도 아니고, 선한가 아닌가의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싸움이며, 그분과 사랑의 교제가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룰만한 조건이나 방법을 가졌거나 전수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나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자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3. 우리의 결국

다시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루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느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인지를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해 다시 기도 화 된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입니다. 기억 하셔야 할 사실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고 또한 여기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전부 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당신이 이렇게 하라 하셨으니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의미에서는 방청객으로 앉혀 놓고 하나님께만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11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는 조금도 끼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과 기도의 응답은 결국 우리의 것이며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의 내용과 근거는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언제나 자기를 근거로 살기 때문이며 내가 내 운명의 최고 책임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는 결국 돈이 가장 확실한 근거이고 건강이 가장 확실한 밑천입니다. 아닌 것 같지만 부닥쳐 보면 절실히 느낍니다. 말로 예수를 믿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진심을 꺼내 놓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에는 그 좋은 믿음이 어디로 갔는지 나오지 않는 것이 우리의 허약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과 근거를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어떤 사랑을 갖고 계시는가 하는데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무너뜨릴 어떤 세력도 없을 것이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는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아직도 내가 이 세상 것으로 시험에 들고 있다면 나의 신앙은 나약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시험에 들지 않을 그 믿음을 쌓아야 합니다. 시편 145편에서 성경에서 즐겨 쓰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145:8-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애굽의 군병들과 블레셋의 칼날 앞에서 구하셨는가를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우리를 선대하시며, 긍휼이 풍성하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블레셋과 모든 대적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런 사건들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들을 안다면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실패와 실수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하며 나는 은혜 베풀기를 원하며 복 주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평안의 근거여야 됩니다. 그러면 그 무엇도 그 평안을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세상이 우리를 손댈 수 없으며 하나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복을 받고 꼬꾸라져도 복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위하시기에 세상에서 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기 위해 부족한 부분들을 손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충만한 것을 다 주기 위해 내게 손대셔서 훈련시키시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 훈련이 우리에게는 어려워 비명을 지르는 일이 있을지언정 결코 절망스러운 비명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절망이라는 말을 등장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제 우리가 가진 믿음의 차원에 대해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불안해하며 무엇으로 자신 있어 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것으로 인해 마음이 든든한가, 아니면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아직 참 믿음의 자리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네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계심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영광의 자리에까지 가도록 계속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그 핵심을 모를 때 나타나는 신앙의 오해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동원해서라도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본문에 있는 ‘저희 말을 인하여’에서의 ‘저희 말’은 무슨 뜻입니까?

4. 우리 신앙의 근거가 하나님이실 때와 우리 자신일 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5. 우리의 믿음이 허약하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6.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의 핵심과 평안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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