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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

본문 / 2: 1- 5

 

 

1. 우리의 자세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영생의 소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이 일하고 있으며, 그레데 섬에 디도를 남겨둔 이유도 이 일을 위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디도가 이 서신을 받고서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바른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거짓 스승들이 나타나 예수 믿는 자들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을 막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 가운데 특히 할례당이 많다는 것인데 그들이 말하는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명령을 좇아가지 않도록 장로와 감독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결국 성도들에게 이러한 교훈들이 주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들로 하여금 믿는 자들에게 악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게 만들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우리 모두는 오늘 말씀을 들어야만 할 자들이며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할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킴으로 우리 모두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하는 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살면 그렇게 사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주어진다는 약속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아닌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는 그러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도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정욕을 피하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으로만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구속하셨다고 말씀합니다. ,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무슨 다른 보상이나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무익한 종의 비유였습니다. 한 종이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고 와서 또다시 주인의 식사시중을 다 든다고 하여서 주인이 사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주인의 식사 시중까지 다 들었다고 해서 그 주인이 수고했다거나 사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종의 자세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며,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교훈을 받을 때에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하여야 하는데 못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사도가 디도에게 오직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른 성경을 보면 그러나 너는(KJV이나 공동번역)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되는 것은 앞에 110절부터 나오는 거짓 스승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양의 가죽을 쓴 이리로서 자기들의 사욕을 따라 일하는 자들이기에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말씀은 그러나 너는 거짓 스승들처럼 하지 말고 바른 교훈에 합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바른 말씀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 바른 교훈의 내용이란 성도들을 자기 사람 만들지 말고 말씀의 사람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 목회자의 말로 신앙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성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 하여도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던데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의 근거요 토대가 되어야지 우리 목사님의 말이 우리 신앙의 근거와 토대가 되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디도를 통하여 성도 각자에게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디도서 21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남녀노소를 구별하여 기록되어 있지만 각 내용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는 남녀노소의 특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남자라고 강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어떤 경우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여성도 남자보다 더 강한 여자도 있는 것입니다. 어른 속에 아이의 요소가 있고, 아이 속에 어른의 요소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목록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으로 받으셔야만 합니다. 다만 각 남녀노소의 특징에 따라 강조점이 조금 다를 뿐이라고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은 여자가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늙은 남자에게는 없으니 늙은 남자는 술 취하여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첫째는, 늙은 남자입니다. 2절의 말씀에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2:2)라고 합니다. 역시 성도라면 다 이러한 말씀의 교훈을 받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늙은 남자의 첫째가 절제로 나타납니다. 늙은 남자라면 세상을 많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가치관이 얼마나 확고하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여도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 있어서 누가 절제를 시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하면서 절제가 오히려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4장에도 보면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4: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늙고 둔하면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이 세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집이 늙은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고집과 주장이 강하여 절제가 되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강조점은 늙은 남자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 절제와 경건과 신중함을 통하여 무엇이 나타나야 합니까? 세상의 명예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온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란 소망과 함께 사용되는 말씀이기에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나타나는 성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늙은 여자입니다. 3절을 보면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라고 하여, 즉 앞에서 말한 늙은 남자들처럼 행실이 거룩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함하지 말며라고 하여 늙은 여자의 특징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함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즉 없는 일을 꾸며 내서 사람들을 현혹하거나 시험 들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그 기운이 입으로만 간다고 하는데 결국 이 말은 그 입을 바르게 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여기 모함 또는 참소라는 헬라 원어가 마귀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특징이 바로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귀의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젊은 여자는 참소하여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이 내용은 늙은 여자에게서 많이 나오는 특징이 참소이지만 남자도 얼마든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적용이 되는 동시에 자신의 신체의 특징에 따라 두드러지는 것이 있기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집안의 여유가 생기고, 이 취미 저 취미 따라 돌아다니던 것도 시들하여지고, 남편은 바깥일로 더 바쁘면 늙은 여자들이 주로 모여서 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남을 모함하면서 술이나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따라 살며 젊은 여자들의 본이 되어 젊은 여자들을 바르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디도가 직접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하지 않고 늙은 여자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으로 보면 교회 권사들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권사님의 역할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는 나이 들어 늙어 가니까 이 말씀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아주 지극히 당연한 길이라고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칭찬과 명예는 부수적으로 따라오고 자녀와 남편들이 칭찬을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젊은 여자

셋째로는, 젊은 여자입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2:4-5)고 합니다.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본을 보이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 가르치는 내용들은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젊은 여자가 누구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까? 남편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들의 사랑의 우선순위가 자녀입니다. 남편에 대한 기대는 신혼 초에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은 것이라고는 자기의 분신인 자녀들에게 과도한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완전히 뒷전이고 자녀들이 우선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무슨 선택의 우선권도 자녀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아버지를 위하여 남겨 두라든가 아니면 나중에 아버지가 오시면 함께 먹자라는 말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가만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순서가 바뀌어있지 않습니까? 특히나 공부를 좀 한다면 아예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도하게 자식사랑에 빠지는 것은 또 다른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지 세상의 가치관이나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중하고 순전하라고 하는데 여기 신중과 순전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생소한 단어입니다. 젊은 여자에게 신중과 순전하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행위를 단속하는 것인데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무슨 신중과 순전을 말하는가 하고서 젊은 여자들이 반박할만한 내용입니다. 또 이 성경이 기록된 문화적 환경은 이미 이천 년 전이니 그 내용을 지금 그대로 적용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 만도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여성 신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문화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음의 말씀은 더욱 더 우리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말씀이 됩니다.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젊은 여자들에게 얼마나 걸림돌이 됩니까? 오늘날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많은 젊은 여성들이 자기 적성에 따라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여성이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흐름이란 말씀이 진리의 척도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경제력이 진리의 척도가 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경제적인 실권을 쥐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힘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돈을 누가 잘 버는가에 따라 일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가정 일을 하고 아내가 돈을 벌어오는 가정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그럴 수가 있다고 봅니다. 남편이 일할 능력이 없거나 벌기는 하여도 최저생계비도 되지 않는다면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남편이 버는 것으로도 살만하고, 남편이 가정이나 잘 돌보라고 하는데도 기어코 일을 하여야 한다는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요즈음 남자들은 맞벌이 할 수 있는 여자를 더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가치관이란 결국 이시대의 정신입니다. 물질만능이라는 시대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란 그러한 가치관에 휘둘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회개하여야지 오히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케케묵은 소리를 하느냐고 항의를 하신다면 오늘 본문이 있는 이 성경을 한 장 찢어버리셔야만 할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학교에서 돌아와 안길 수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인데 학교 앞에서 바로 학원차타고 또다시 경쟁사회 속으로 밀어놓고서는 자기는 자식을 위한다고 그래서 그 학원비를 마련하려고 일하러 가는 이 시대에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옳고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할 것이며 또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세대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젊은 여자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 복종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위함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하면 나중에 자녀가 더 잘된다고 하는 보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그렇지 아니하면 말씀이 비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 세상의 정신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고 있는 것이며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게 없는 세상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 말씀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고 여기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 받게 하십니까? 아니 이미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나부터가 이미 말씀을 비방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하나님이 항상 옳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 말씀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게 하는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고자 하는 것과 오늘 말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오늘 말씀을 교훈으로 받고자 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 본문에 늙은 남자에게 하는 권면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본문에 늙은 여자에게 하는 권면은 무엇입니까?

5. 젊은 여자에게 말하는 가정에서의 사랑의 우선순위와 그 사랑의 근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7. 젊은 여자가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살아야 하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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