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0,725
오늘 : 144
어제 : 280

페이지뷰

전체 : 78,737,742
오늘 : 836
어제 : 1,339
조회 수 140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우리의 신앙

본문 /  요17:22-23


오늘 본문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광이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그의 존전에 서는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교회 안에서라’는 조건이 붙어서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너무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하는 고백이 어떤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 얻게 된 것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도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영광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신앙의 오류를 범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배하고, 찬양 드릴 수 있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굉장한 일인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한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의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의 내용들을 다 소유하지 못한 채 세월을 허송하기에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시 우리의 신앙과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구약의 하나님

우선 신자의 신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우리들은 이미 이 빛의 비취임을 받아 이 자리에 까지 나아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취어져서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사귀게 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소개하고 그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을 가장 큰 핵심으로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도 요한복음 1장 18절에 있는 것과 같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다.’로 묘사됩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표현됩니다. 궁극적인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예수를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연장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말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특권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신약에서 묘사된 하나님과는 좀 다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어느 정도이며 그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나면 큰 감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 5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신5:22-27)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묘사 중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라는 묘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달리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말씀하시고, 구름 가운데 계시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친밀하게 느껴지느냐 아니면 두렵게 느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운 느낌을 받은 듯합니다. 시내 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자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고 빽빽한 구름이 산을 뒤덮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만하십시오. 우리가 죽겠으니 모세 당신이 가 듣고 와서 전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뒤에 가면 ‘누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같이 산 자가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만일 음성을 직접 들으면 다 죽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간접적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직접 그랬다면 귀와 눈이 머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서 그냥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 가운데서 라는 말씀은 삼키고 태우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구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구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이 승천하시자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리는 구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은,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가림이 없이 바로 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이기 때문에 구름으로 가리워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름으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은 성막을 지었을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성막에 구름이 덮였다는 것은 곧 영광이 덮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가리우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을까요?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성전을 짓고 난 다음의 기록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8:10-11) 이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감추시는 구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표현한 곳이 있는데 시편 18편입니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시18:10-11) 이렇게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시는 분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여기서 자신을 감추시고 흑암으로 두르시고 계신다고 합니다. 안 보이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시97:1-3) 흑암, 구름, 감추시는 것, 심판하시는 것, 이것으로 구약은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상징적으로 할 때 율법적 성격을 강하게 띠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복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복음이 있고 구원이 있지만 성격상 율법적인 성격을 대표합니다. 율법적인 성격을 대표한다는 것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율법은 그래서 심판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우리가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너무도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온 천하 만물을 주장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우리들도 그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입니다. 피할 때도 없고 방법도 없습니다. 이 같은 우리를 위해서도 늘 가리고 나타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2. 신약의 하나님

그러나 신약에 넘어오면 이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바뀝니다. 요한일서 1장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 빽빽한 구름 가운데 계시며 그 음성을 들으면 죽을 것 같은데 신약에 오면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기독교를 소개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복이며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인지를 자꾸 놓치게 됩니다. 빛이시라, 어둠이 없다는 그것으로 인해 가능해 진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1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6-7)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사귀려면 일단 가까이 만나야만 하는데 그러기위해선 우리는 죄와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심판받을 수 있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서 사귈 순 없습니다. 재판관과 피고 사이에는 사귐이 아니라 법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그 앞에 설 수도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이제는 사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분으로 지금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가 판사라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냥 아버지 그러면 거기에는 법적인 관계가 들어올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신자의 영광입니다. 요한일서 2장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1-6)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너희가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것을 안 지키면 그 사귐이 어찌 진정한 사귐이 되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만일 남남 사이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생기면 그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루고 변상하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만일 혈육 관계라면 ‘너 어떻게 아버지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육의 관계에서는 변상하고 갚으라는 식으로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는 잘못하면 형벌을 받지만 신약에 오면 더 이상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너희가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자녀답게 돌아오라. 어찌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그렇게 밖에 못 섬기느냐?’라는 말이 있을 뿐이고, 이런 지적들도 형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 된 것을 제대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놀라운 선언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로마서 8장 1절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제 결코 정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돌아오라’는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이야기이지, 심판과 정죄를 위한 경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만은 용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그렇게 우리와 가까운 분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표현의 차이가 나는 이유입니다.


3. 우리의 하나님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며 그의 모든 기도에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것과 같은 그 영광과 그 특권과 그 자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별 짓 다하고 살다가도 주일날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오면 하나님은 또 우리의 찬송과 기도를 받으시고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영광의 자리에 초대 받고 있고, 허락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에 말씀과 빛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5)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드디어 드러내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를 드러내고 그 안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때에 가장 큰 기준은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섬기느냐, 사랑의 하나님으로 섬기느냐 입니다. 사귐에 관한 이야기에는 반드시 사랑이 등장합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형벌을 받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귀며 사랑을 나누어 기쁨이 충만한 자리에 초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벌로 말씀하지 않고 사랑에 관한 설명으로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놀라운 선언이 하나 더 나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여기에 분명히 구별하여서 살펴야 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두려움은 구약적인 신앙이요, 사랑은 신약적인 신앙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구약적인 개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혹 잘못하기라도 하면 ‘이러다가 내가 한 대 터지지’라는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식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할 때만큼은 시간을 잘 지킵니다. 그런데 시간을 지키지 못할 일이 생겨서 못 지켰다고 삐져 버립니까?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삐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을 하는 겁니다. 온갖 생각이 다 납니다. 그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떻습니까? 환난이 없고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앙의 근거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밖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장 큰 특권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뵈어 사귀며, 그 크신 사역에 동참하고, 그 영광을 뵈오며, 하나님의 충만하신 영광으로 채우는 이런 일들은 안 하고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오늘도 내 마음은 편하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잘못했다 싶으면 기도나 봉사나 헌금과 선행에 열심을 내어 대차대조표를 맞추어 나가는 형태의 신앙이 아닌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는 이 말씀보다 더 놀라운 표현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인도 아니고 종도 아닙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이지 잘잘못을 법적인 차원이나 심판의 차원에서 묻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남남의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살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신분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서 한 목소리로 찬송을 드리고, 신앙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안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고, 우리가 가는 인생에 어느 한 순간이라도 우리 혼자 있는 시간이 없이 함께 하시고, 지키시는 분으로,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이 내게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우리의 감사와 찬송과 소망이 모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복의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보게 되면 사람들이 죽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만나고자 취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사귀게 하시려고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4. 신약에서도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구약과 신약의 판결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신앙을 점검할 때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이며, 우리 신앙의 근거가 사랑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6월 20일 2부 /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우리의 신앙 관리자 2010.06.19 1402
572 1월 30일 1부 /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하게 하시리라 관리자 2011.01.25 1386
571 8월 29일 1부 / 오해된 신앙과 합격점을 받는 신앙 관리자 2010.08.28 1385
570 5월 13일 2부 /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관리자 2012.05.19 1384
569 1월 6일 2부 / 능히 서게 하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1 관리자 2013.01.21 1384
568 11월 14일 2부 / 우리를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능력 관리자 2010.11.12 1376
567 2월 20일 2부 / 십자가의 도와 우리의 자랑 관리자 2011.02.18 1373
566 3월 4일 2부 / 새 언약의 일꾼과 영원한 영광 관리자 2012.03.04 1373
565 10월 10일 2부 / 빌라도와 같은 판결을 하며 사는 우리 관리자 2010.10.09 1371
564 6월 17일 2부 /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관리자 2012.06.16 1364
563 4월 1일 2부 /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과 같은 믿음 관리자 2012.04.04 1362
562 11월 13일 2부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노니 관리자 2011.11.13 1360
561 11월 6일 2부 /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섬기는 자 되라 관리자 2011.11.06 1359
560 10월 24일 1부 / 십자가 현장에서의 거룩한 음성 관리자 2010.10.24 1357
559 3월 3일 2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관리자 2013.04.10 1351
558 12월 16일 2부 / 꿈꾸는 사람들은 화 있을 진저 관리자 2012.12.16 1344
557 10월 3일 1부 / 진리를 듣고도 육신적은 삶을 사는 자 관리자 2010.10.02 1339
556 8월 22일 2부 / 자녀 되고 지체된 우리에게 요구된 신앙 관리자 2010.08.21 1337
555 9월 12일 1부 / 하나님께 붙잡힌 우리의 운명 관리자 2010.09.11 1334
554 4월 3일 2부 / 하나님의 것이 된 우리의 자랑 관리자 2011.04.02 1322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