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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광에서 영광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문 / 요17:22-23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점점 뒤로 갈수록 하나 됨과 영광 같은 단어를 자주 쓰고 있는데 특히 22절 이하부터는 주님께서 하신 기도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이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를 ‘하나 될 것’‘사랑 안에 거할 것’으로 말씀합니다. 신자의 결국은 천국이라는 것을 신자라면 누구나 다 압니다. 그곳에서 주를 만나고, 다시는 눈물과 애통과 상하는 것이 없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살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와 같은 영광이 우리 신앙의 결론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근거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신앙의 근거와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영광에서 영광으로

사실은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이 영광에 대한 개념을 보다 깊고 오묘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영화롭게 하사’라는 이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지금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란,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일에 동참하고 쓰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며, 아버지께서 하려고 하는 일에 참여하며, 아버지의 뜻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무엇이냐 하는 설명도 이런 차원에서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무엇이냐’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결함이 하나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 곧 교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라면 하고, 말라면 안하는 관계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존재하므로 여기엔 대등한 교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인과 종의 관계로는 요한복음 17장이 목표하는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는 목적지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이 옳고 착한가 하는 사실을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에 머무는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에 쓰임 받는 영광에 참여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광이란,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시는 것에 동참하고 쓰임 받는 것이며 이것이 곧 영생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의미에 대해 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아버지를 알기 보다는 윤리적인 도덕관과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느냐 하는 문제에 더 집착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생각할 때에 단지 살기 편하고 좋은 곳이기에 천국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자세인 것입니다. 천국은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어야 합니다. 천국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곳이 아니라, 거기에 가면 사망과 눈물과 애통과 이별도 없고 지금 같은 고생을 안 하니까 가고 싶은 곳이라면 사실 너무나 유치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달콤한 사탕 맛에 빠져 있는 순간에는 아빠를 잊어버리고, 그 사탕 맛이 그리워질 때에만 사탕 값을 치루기 위해 아빠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할 때 이 영광은 무엇일까요? 이 영광은 곧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사귐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 사귐이 곧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에 가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에 10절에서는 영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교제가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영광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 영광은 앞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완성적인 차원에서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 하고, 말라는 것은 안 하는 차원의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게 하여 완성되는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를 대개는 잘 모릅니다.

 

2. 주님이 주신 영광

사람이 살다보면 그 람이 사람답게 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철이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람은 사는 동안에 여러 번 변합니다. 그리고 변할 때마다 얼마나 크느냐에 따라 ‘그 사람 철들었다.’거나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한 존재로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수준을 높여 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는 더더욱 그런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궁합뫈다.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무궁토록 산다는 것은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 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곳은 살아도 살아도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풍성한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과 하나 됨에 관한 문제요, 하나님을 아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같은 주제로 쓰여진 책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타나내려 오셨다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진행형의 뜻을 지닌 현재형입니다. 즉, 계속적으로 예수님이 그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가 말씀 하시는 것과 어떤 행위를 포함한 모두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아버지 품속에서 존재하시고, 말씀하시고,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과 나타내는 존재는 언제나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내셨던 모든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기록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요한복음 5장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20)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과 따로 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독자적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있으며, 어떻게 깊은 마음의 교제가 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사역이 있고, 비전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가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0-42)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줄, 그 두 분이 한 마음인 줄, 생각이 같은 줄, 같은 뜻을 품고 기쁨으로 하나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고 증명하는 것이 본문의 초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의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말씀과 모든 것으로 우리로 아버지를 만나게 하며 아버지를 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사귀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자신을 증명하는 하나의 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과 거리가 멉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은 단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최선의 자격과 조건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나를 치장하기 위해 거룩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거룩해 지고 신앙을 영위한다면 그것보다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의 기초를 가졌기에 쉽게 다른 신자들의 실수와 잘못에 눈에 불을 켜고 정죄하려 드는 것입니다. 거룩해진 것을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자기 치장으로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결코 그런 것을 위해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 거룩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주일 아침에 모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한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모임을 성회라고 했습니다. 모임 자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얼마나 열심히 설교를 듣고 봉사했느냐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모이는 것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설교가 강조되고 있지만 원래 옛날의 예배는 설교가 이렇게 길지 않고, 성경 구절을 같이 읽는 정도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 공부라는 것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성경 공부가 필요합니다. 공부로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깊이 있게 해야 되고, 넓혀야 되고, 모르는 것들을 깨우쳐서 살찐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사귀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을 보면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그렇게 설레고 영광스럽기보다는 어떤 설교를 듣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젠 설교 잘하는 목사와 설교 잘 듣는 신자만이 있지 영광스러운 예배라는 것은 사라진 듯합니다. 그 신성함과 경외함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와서 너무 쉽게 예배를 봐주고 돌아가서 오늘 설교 잘하더라 하는 말을 남기고는 자기 길을 가는 신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일제치하 때 마음 놓고 예수를 믿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비밀리에 몇이 모여 몰래 예배를 드리게 되면 ‘주님!’이라는 한 마디에도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주님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큰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껏 허락되자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신나는 일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시 그 분위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에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며 대단한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영광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3. 교회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이 영광의 빛이 우리 심령에 더 밝게 비춰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복음 전도자들은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해 중매쟁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1-2)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인의 사명입니다. 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떠들어 대는 논리나 철학이나 도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사귐이요, 아버지를 아는 일이요,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변하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이 영광이라고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둘 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유일한 중개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소개하는 중개인이라면, 교회야말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초대받고 온 자들이 하나님을 알며 사귀는 일에 더 풍성한 자가 되도록 의도된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8-12) 결론은 하나님께 나아감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게 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러기 위해 두 가지 중개소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중개소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우리를 바로 교회 안에서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교회라는 중계소에서 우리는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더 수준이 높아지고, 더 깊은 교제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기에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교회란 쉬운 곳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곳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으로 목표하는 것을 기어코 추진해 내시고 만들어 내는 신령한 공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픈 곳이기도 하고, 어려운 곳일 수도 있으며, 숨이 넘어 갈 것 같은 심각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안에는 분명한 복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이 계획되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오늘 교회에 갈까 말까 하는 생각은 세수를 할까 말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세수를 남을 위해서 합니까? 이를 닦고 공부를 하는 것이 남을 위해서입니까?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는 것이 허락되어 지고 있다는 이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훈련되어지고 나아가야 될 것인지를 모르면 기도로 묻고 그 약속들을 근거로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 놀라운 영광의 완성된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잠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의도대로 우리 모두가 순종함으로 움직이며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은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로 세워져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이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따르는 관계를 넘어서 성경이 요구하는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2. 10절의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과 24절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요한복음 1장 18절의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예수님께서 사역과 말씀으로 나타내려고 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의 예배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6. 예수님과 교회가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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