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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로우신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룩과 의의 신앙

본문 /  요17:25-26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며 그 영광 된 자리에 초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에서 ‘의로우신 아버지’라는 말씀을 가지고 거룩과 의를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의로우신 하나님

기독교는 우리에게 분명히 영광과 승리와 복들을 약속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은 언제나 거룩과 의라는 것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의와 거룩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최고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거룩과 의를 제쳐 놓고 영광과 승리와 복을 이야기 하면 그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언제나 의와 거룩입니다. 레위기 20장입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 출애굽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죄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거룩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려야 했던 곳이 시내산 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에게는 거룩해 진다는 것이 아무리 해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죄악과 죄의 형벌에서 고통 받는 우리를 꺼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식으로 표현하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어 우리가 하나가 되어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던 영광을 저희도 보게’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갖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종의 상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며 출발점 선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구원의 기쁨이 있고 확신이 있다고 하여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이 내게 요구되는 거룩을 향한 신앙생활을 경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6장입니다.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26:16-19) 물론 구약과 신약의 표현이 다릅니다. 구약의 표현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면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해지려는 소망이 있어도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해지려면 그 최소한의 기초가 되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어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가 되었고 그 거룩을 지킬 능력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때문에 학교에 갔다 와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가사에 도움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이런 환경 속에서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공부를 못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이런 모습이 구약시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신약시대는 부모가 계시고, 공부를 시키려 좋은 학교도 보내주고, 공부방도 따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저절로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야만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좋아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습니다. 옛날과는 달리 이제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과는 다른 조건에 있으면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아 거룩을 경주해야 되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놓친다는 것은 크나큰 불찰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로우신 아버지여’라는 기도를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를 은혜로 불러 내셨지만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롭기를 요구하시며 의롭게 되기까지 우리를 죽지도 못하게 하시는 열정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2. 신앙훈련

그렇기에 구원의 확신이 있어 지금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음에도 안 데려가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졸업학점이 모자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내가 살아 있어서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경우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있어 우리가 남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남아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누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어떤 면에서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생애인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신28:9)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그러면 성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성민이 된다는 것은 단지 신분적인 차원만이 아닌 수준적인 차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요구를 받는 자들은 이미 출애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넘어오면 이런 표현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로마서 6장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이젠 우리가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격, 불합격선의 기준이 되는 그런 시험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내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느냐 하는 것이 내 생애에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되느냐 불신자가 되느냐의 식의 요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와 법아래 있지 않으니 이제는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외 없이 모두 죄의 종이기에 선을 행하고 싶으나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은 죄의 종의 상태에서 벗어났기에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권면이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예수를 믿으면 무슨 자동 기계에 의해 기다리기만 하면 완제품이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매일 싸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니 이제 다시 죄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시험은 자기가 벗어나온 죄악의 자리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죄의 종노릇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분적으로는 죄의 종이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죄의 종노릇 하는 일이 가능하며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지옥에 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천국 시민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죄의 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에 대해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지를 성경이 익히 알고 있기에 이런 권면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중 하나는 ‘이젠 주님만 사모하며 신앙생활을 잘 해야지’하는 감동과 결심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마치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잘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오직 반복 또 반복 밖에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훈련도 하고 또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는 죄악의 더러운 것을 누르고 또 누르고 해서 그것이 안 나오도록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나쁜 생각이 나는 것을 안 하고 안 해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습관적으로 안 나오게 해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훈련이며, 신앙생활이란 이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교사로 나가고, 선교사를 돕고, 하다못해 교회에 헌금 내고, 예배당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생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대로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 열매

그러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사업을 성취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7장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이것은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이어서 등장시킴으로 앞뒤의 내용이 같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로 연결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초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둘 다 똑같은데 기초가 반석이냐, 모래였느냐의 차이로 무너지기도 하고 안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것에 대한 비유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말씀을 들었는데 행한 자와 행치 않는 자의 비교라면 그것은 실천에 관한 문제로 집에 비유하여 기초 위에 집을 잘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비교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행한 것은 같은데 무슨 기초로 했느냐를 지적하는 내용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다’하는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기초 위에 지은 것이 아니다.’고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은 집과 열매가 어느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에 따라 예수님 앞에서 합격점을 받기도 하고 불 합격점을 받기도 한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15절부터 이어져 온 내용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5-20) 말하자면 열매와 나무는 언제나 직결되는 내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선지자 노릇이나 귀신을 쫓는 것 또 권능을 행한 것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나무에 그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열매는 직분이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어떤 일을 행할 때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은 늘 있어 왔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에게 요구되는 신자의 신자 된 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열매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이 나타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6-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열매를 보아 그를 아는 것과 같이 ‘성품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하나같이 성품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부분들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능력이나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이 하나님의 성품적인 요구는 우리 신앙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독교적인 사업이나 행사에 얼마나 힘 있게 참여했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을 신앙의 전부인줄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한 행복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는 그 힘만을 요구하기에 신앙이 거꾸로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거하시고 교제하시며 그의 영광 속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거룩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 적으로 ‘의로우신 아버지’ 곧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만큼 신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증거 되고, 열매 맺고, 변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이상 죄에 팔아먹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니 죄를 이기고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좇지 말고 성령을 좇아 모든 죄를 극복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세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거룩해 지는 것이 우리의 자랑과 영광과 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시기까지 우리에게 확인시키고자 하신 기도의 가장 놀라운 결론이 바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그의 거룩한 자녀들인 것을 기억해서 우리의 생애를 고치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이 거룩을 도입하여 우리 자신을 보면 더 많은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간절하고 참다운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오셔서 말로만 믿지 마시고 이 거룩의 길을 묵묵히 감으로 승리하는 나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신약과 구약의 거룩에 대한 요구에 대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2.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신앙생활의 훈련은 어떻게 하며 그 훈련의 중요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4. 우리 신앙의 직분이나 능력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열매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과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의 열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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