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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본문 /  요18: 1- 9


요한복음은 18장 이전까지는 사건들이 갖는 뜻과 의미들에 대해 많이 할애되어 기록 되어 있지만, 18장 이후부터는 별 설명이 없이 갑자기 주님의 수난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 절정을 맞으며 급격히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속도에 비해 굉장히 급박한 느낌을 줍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없었다면 아마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그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이 있었기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대해 거꾸로 그 의미를 재 추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뒤에 나타나는 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 그 모든 것들의 의미들을 뒤집어서 생각하게 해줄 정도로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갖는 엄청난 사실과 충격이 있어야만 그것을 기초로 해서 예수님의 말씀들이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수난과 부활이 예수님에게 없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들과 그 생애는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에 불과하고 말 것입니다. 跸래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우뤬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숐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기록은 같은 시각 속에서 보고 기록한 앞의 세 공관복음과는 아주 판이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가졌던 시각과는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과 진리의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21장까지 걸쳐서 나오는 이 수난과 부활 사건에 있어 중요한 개괄들을 먼저 살펴 우리 신앙의 기초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1. 요한복음

요한복음 21장까지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기록에 있어 먼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서 와는 달리 예수님의 수난이 감상적인 차원에서 기록된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러면 먼저 비장함과 더불어 어떤 승리보다는 처절함이 먼저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라고 하면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던 기도나 처절한 피로 물든 십자가 등으로 거의 색칠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감상들입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의 묘사 가운데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26:36-38) 여기 내용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일을 얼마나 어려워 하셨고, 힘들어 하셨는가 하는 묘사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입니다.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막14:32-34) 또 누가복음 22장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39-44) 또 마가복음 15장에도 보면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오늘 우리가 살피는 이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묘사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뭐가 중요해 보이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상당히 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만 해도 여기엔 기도한 사건부터 없습니다. 기도한 사건도 없고 기드론 시내를 거쳐 동산에 가셨는데 잡으러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다른 공관복음에서 본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이 얼마나 힘들어 하셨고 이 수난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느냐 하는 묘사 보다는 당당한 묘사가 더 많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18:4-6) 여기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는 말씀은 ‘튕겨져 나가 땅에 곤두박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공관복음의 표현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공관복음은 할 수만 있으면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면 여기서는 전혀 다릅니다. 수난 당하시는 것이 잘 하시는 일 같고 승리의 길 같고 기쁜 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얼마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었든지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놀라서 나가 떨어져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군졸들의 검과 창에 의해 잡혀간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잡혀 주신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잡혀 가셔서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는 최후의 음성이라든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못 지고 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더라는 그런 기록들이 전혀 없습니다. 아주 놀라운 기록입니다.


2. 기록 목적

19절 이하에서도 빌라도와 대제사장 앞에서의 심문 당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당당하십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요18:19-23) 체포된 자 같은 모습이 여기에 하나도 없습니다. 또 33절부터 보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요18:33-37) 여기도 보면 당당하게 왕이라고 하십니다. 19장에도 보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요19:8-11) 그리고 21절 이하에도 보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19:21-22)고 말씀 하십니다. 또 28절 이하에도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28-30) 이처럼 요한복음에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도 고난과 고통과 처절한 묘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에 자기를 스스로 맡기시는 모습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돌아가시는 장면도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고개가 떨어지는 법인데 여기 주님에 대한 묘사를 보면 고개를 숙이시고 나서 그 영혼이 떠나가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야 비로소 죽음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결코 찾아 올 수 없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기록이 다른 기록들과 다른 특성들입니다. 28절 이후에도 보면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 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과는 그 관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목마른 것도 그 분이 목말라서 목 마르다기 보다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함이었으며, 예수님이 그렇게 호락호락 잡혀가실 분이 아니신데 바로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싶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믿게 하며 그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과 그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에 모든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강조는 상대적으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신앙의 길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사망 아래 자신을 두시고 십자가를 지시러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느냐는 차원에서 의도되어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인생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을 모르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인이 없이 나아가는 신앙은 그야말로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정욕을 따라 사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활을 디모데전서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함과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은사가 세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병 고치는 은사고, 둘째는 예언 은사 그리고 셋째가 방언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은사를 그토록 많이 받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이 은사를 이익의 재료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기기 때문에 교회 안에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일들을 신령한 경건을 위한 목적으로 사모하지 않고 단지 육신적이고 인위적인 이해관계로 인하여 추구한다면 십자가를 밀쳐내는 행위일 뿐입니다. 오늘날은 예수 믿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여졌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번영만큼 신앙에 큰 유혹도 없습니다. 물질적 이익에 철저히 단련된 사람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주일 아침에 교회에 찾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을 육적인 이익의 재료로 계산하는 사고방식 속에는 참 신앙이 자리 잡을 틈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경건을 육적인 이익의 재료로 여기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원하시는 뜻을 나도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차원의 신앙이 참 신앙의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기독교인이 된 것을 교양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 우리에게 무슨 좋은 교훈되는 일이 많을 것이며, 이익거리가 많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길은 영원한 것이고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 부정적으로 되어버렸습니다. ‘목사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목사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하는 말을 이제는 더 이상 마음으로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시키면 하나님이 시키는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 듣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하는 말이 맞기도 했고 안 맞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들이 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말은 맞고 어떤 말은 안 맞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맞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데 안 맞고 틀리는 대목에 와서는 그만 그것을 핑계로 삼아 신앙이라는 것을 모두 다 집어 던져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왔더니 누구는 보기 싫고, 누구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믿을련다'하는 이야기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잘못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입니다. 난 누가 헌금 좀 내고 생색내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렇게는 안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나 자신이 손해입니다. ‘누가 기도 좀 한다고 설쳐서 나는 기도 안 해' 이것도 자기가 기도 안한 만큼 손해입니다. 공부 좀하고, 돈 있다고 큰소리치는 보기 싫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난 이런 꼴 보기 싫은 세상은 살기 싫다’고 한다면 우리 손해입니다. 보기 싫은 것은 보기 싫은 것이고, 살기는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믿지 마시고, 너무 쉽게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기독교는 사실에 관한 것이요, 진리에 관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1-8) 우리는 이런 사모함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온당치 못한 일들 투성이 입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이 오류투성이입니다. 세상일은 본래 그렇다손 치더라도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진리를 사수하지 않는 일을 볼 때에 더더욱 속 썩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마저도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빈틈이 없으시고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계산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억울한 일들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억울해 하지마시고 시험케 하는 일들에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실수를 합니까? 그러나 그런 일들을 보고 겪었다고 하여 내가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후퇴하는 일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나가서 누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런 이야기는 할 것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을 바로 준행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오셨으면 우리는 다 그 앞에 죄인들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붙잡아 영원을 준비하는 길에서 우리가 이탈되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신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기로 작정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보는 시각이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과 다르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우리 생각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사도 요한을 통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무엇입니까?

4. 우리의 신앙은 결국 무엇이며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사람이나 교회가 마음에 안 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진리를 사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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