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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울의 부탁과 마지막 인사

본문 / 3: 9-15

 

 

1. 다시 한 번 은혜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 부탁과 끝인사입니다. 오늘 본문 끝인사말 부분의 부탁도 있습니다만 우선 지난주와 연결된 부탁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 말씀 8절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굳세게 말하여 모든 믿는 자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선한 일에 힘쓰게 하라고 합니다. 이 미쁘신 말씀의 내용은 우리가 어리석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속은 자로서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하던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입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로 그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굳세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인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는가 하는 것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8-11)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8절의 아직 죄인 되었을 때, 10절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것은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원수가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원수를 위하여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진노에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무슨 행위가 아니라 화목제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굳세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지난주에 바울은 말하였던 것입니다.

  

 

2. 권면하고 멀리하라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러한 것과 반대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3:9)고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드러났는데 또다시 어리석은 변론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모든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면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서의 내용들을 보면 이러한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율법에 대한 다툼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런 이단들의 주장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다고 변론하여 오는 자들이 이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3:10)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 그리고 율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 완전한 속죄와 의롭다 하심을 부인하게 하거나 부족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한두 번 훈계하여 보고서 듣지 아니하면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단이라고 하는 단체들 중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엇을 주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증인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여호와의 일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또 안식교는 어떻습니까? 안식일은 율법이전에 주어졌기에 안식일은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토요일을 안식일이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미 날과 달과 절기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것이 완성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림자인 날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2:16-17).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일조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이전인 아브라함 때에 처음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도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드렸다고 하면서 이것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다가 멜기세덱에게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승리가 자기의 능력에 있었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보이는 믿음의 고백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물질을 내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며 또 내 모든 것의 주관자임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 십일조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고백이 없이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승리가 주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십일조를 바치듯이 우리 또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내용과 고백이 우리의 십일조에 담겨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처럼 날과 달과 절기를 따라 모이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날마다 모였듯이 성도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헌금도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자발적인 연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도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 안에서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세워지기를 원하며, 이런 인도함을 따라 행하여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즉 자율주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3:11)고 합니다. 부패한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스스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죄의 기준을 가지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성령님이 오시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6:7-11)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기준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이미 부패한 이단인 사람들은 어떻게 죄를 규정하느냐 하면, 자기들 스스로 율법을 정하여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인 용어를 가지고 정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율법을 키는 것으로, 안식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죄란 바로 자신들이 정한 이런 것을 안 하면 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로 정하고 정죄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면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 어쩌다가 새벽기도를 하루 빠지게 되면 무슨 마음이 들겠습니까? 죄책감이 드는 것입니다. 또 자기처럼 새벽기도회 안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벽기도 나오면 죄가 아니고, 나오지 아니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죄로 정하여 놓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새벽기도회 30분 못하여 죄를 지었으니, 오늘은 어제 빼먹은 30분 몫까지 해서 한 시간 기도하여 어제의 죄를 상쇄하자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죄는 새벽기도회를 못 나간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회를 자신이 정한 율법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을 스스로 죄로 여길 뿐만 아니라 또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마음과 시도 자체가 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렇게 죄를 정하여 자신에게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성이라는 것이 우리를 늘 이런 모양으로 끌고 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복음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무슨 사고나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당장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혹 내가 십일조를 떼어 먹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기도를 안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가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법을 만들고 또 스스로 정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답시고 한다는 말이 예배 빠지지 않기, 금식기도하기, 특별헌금하기 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함으로 지금 문제를 해결 받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칠 더 큰 벌을 받지 아니한다면 얼마든지 해 내겠다는 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인간의 종교성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천주교에는 우리가 잘 아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도들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서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고해성사 뒤에 있는 보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고해성사로 죄사함을 받은 자가 그 죄를 사함 받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신부가 말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부가 신도들의 고해성사를 듣고서 적절한 보속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성경 몇 장씩을 읽으라든지 아니면 어느 단체에 가서 자원봉사를 얼마나 하라든지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렇게 신부들의 보속을 듣고 행하면서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겠습니까? 어느 정도 갚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족한 것으로 여기기에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를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사람들은 한두 번 교훈하여 보고 안 되면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 인사

이제 마지막 인사입니다. 12절에 보면 아데마와 두기고를 디도에게 보내면서 니고볼리로 오라고 합니다. 바울이 거기서 겨울을 지내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율법교사 세나와 아볼로를 디도에게 먼저 보내어 무엇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것은 디도로 하여금 세나와 아볼로로 하여금 궁핍함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나와 아볼로에게 물질적으로 후히 대접하여 바울에게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3:14)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이란 바울의 복음을 듣고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열매가 있도록 좋은 일에 힘쓰는 것은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도와주도록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열매인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자원하여 돕는 일들이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었기에 그래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이미 다 받았기에 자원하여 감사함으로 이들을 돕는 것이 그 사람의 복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3:15)라고 합니다. 바울의 편지 끝에는 거의 다 문안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단지 편지의 끝에 인사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있는 자가 다 디도에게 문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믿음 안에서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디도가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까? 복음 안에서 진정한 나눔과 감사의 교제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복음 안에서 교제를 원하여 함께 모이기를 원하면 우리는 정말로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서 그와 함께 교제를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함께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기뻐하며 교제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 안에서 복음으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가 그 피로 형제 되게 하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형제와 나누기 위해, 더욱 더 서로 세워지기 위해 주 안에서 모이기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제 디도서의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안에 유익하고 선한 열매들이 가득하도록 늘 두 가지 인식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의 원수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떠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기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늘 굳세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 할 것은 무익하고 헛된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를 추가하려고 하는 자들을 주의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죄를 정하여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멀리 하시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교제하시면서 선한 일에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주는 자의 복이 풍성하여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인식과 또 굳세게 말하여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본문에 보면 이단은 어떤 자들이라고 하며 또 그들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3. 오늘날 이단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틀린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이단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과 또 그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우리 스스로 만든 법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또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는 어떠한 것을 말합니까?

6. 우리 스스로 만든 법을 어겼을 경우 우리 스스로 만든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믿는 자들의 복과 열매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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