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언약과 내용
본문 / 창 6:17-22
1. 언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고 믿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말 그대로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언약의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알지 못하고서는 성경 해석 자체가 불가하다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 즉 믿음의 본질이 크게 왜곡되어 있는 것도 사실은 언약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언약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실 때 언약의 대상자인 인간의 의사를 묻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언약에 대한 의사를 물었다면 인간은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을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여기고 그 언약을 맺을까 하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믿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사실 언약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애당초 믿음은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내용임을 생각한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믿음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 즉 믿음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성취하게 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언약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은 종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자는 믿음이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언약이 아니면 인간은 생명과 상관없는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기에 언약하시고 또 그 언약 하신 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처럼 언약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 즉 노력과 열심만 있으면 그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에 언약 신앙은 자신이 부인되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언약이 증거하는 것은 인간의 실천과 행함 그리고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언약이 증거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내용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것입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고 말합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이 마치 구원의 중심이 유대인이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여기서 유대인은 혈통적이거나 민족적인 의미에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유대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게 된 것이 곧 구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유대인과 이방인도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서 구분되어야만 합니다. 교회 출석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이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언약 관계 밖에 있는 것을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 2장에 보면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증거로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행하는 할례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유대인인 것과 또 자신들이 지켜 행하는 규례인 할례라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참된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으로 굳게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이 자부했던 모든 표면적 조건을 부인해 버리고 오직 이면적 유대인을 참된 유대인으로 인정하고 할례 역시 육신이 아닌 마음에 하는 것을 참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할례도 한번 행하면 사라지지도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도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영원한 것이 마음에 박혀 자리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변하지 않고 또 사라지지 않으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믿는 것이 마음에 할례를 행한 것이고,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에게만 두게 되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러한 할례가 있는 그가 진정한 유대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언약을 중심으로 했을 때에만 가능한 해석인 것입니다.
3. 은혜를 입은 노아
오늘 본문을 보면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6:17-18)라고 합니다. 세상은 모두 심판을 받는데 유독 노아의 가족만 구원받는 내용에서 언약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노아 가족의 구원이 언약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언약을 무시하고 노아와 가족의 구원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노아에게서 구원의 조건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앞에 9절에서 말하는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라는 내용이 구원의 근거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로 인정을 받을 만큼 신앙생활이 철저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드는 일에 순종했다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 또한 구원받은 자로 살기 위해서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일컬음 받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노아이지 노아의 모든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노아의 가족까지 방주에 들어가도록 했던 것입니까?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그 가족도 구원하신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믿음 생활 잘하면 그 가족도 구원받게 된다’는 비성경적인 주장도 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가 언약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노아 가족의 구원은 노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노아에게 구원받을 조건이 있었음에도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 노아 역시 심판받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말합니다. 즉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심판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말씀하심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노아의 의가 아니라 노아에게 세우신 언약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노아가 물 위의 방주에서 경험한 것은 죽음에서의 구원입니다. 자신 외에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하나님이 심판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방주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살았다는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 마음대로 방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노아가 방주의 주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방주를 만든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면 자기 가족만 들어가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들어가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동물이 들어가는 것보다 사람을 더 많이 태우고 구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으되 방주는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세우신 노아와 가족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구원은 언약에 의해서 구별된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안다면 자신을 보지 않고,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자기 의로 여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언약을 세우시고 이루심으로 우리를 구원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만 높이게 되는 것이 언약을 믿는 언약의 세계인 것입니다.
4. 두 언약
그런데 언약에는 두 가지 언약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옛 언약이 있고 또 새 언약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옛 언약은 구약이고 새 언약은 신약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31:31)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도 이미 새 언약이 등장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지켜 향하면 구원하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옛 언약에 실패했습니다. 옛 언약의 실패로 드러난 것은 자기 구원과 의를 위해 행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열심과 실천이 생명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옛 언약을 주시고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무능을 알게 하신 후에 비로소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따라서 새 언약에 의한 구원의 법칙은 이미 옛 언약에서 확인되고 점검된 것처럼 인간의 실천과 열심에 의한 가능성은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새 언약을 세우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하심뿐이며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새 언약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에 대해서 인간이 한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예레미야 31장을 다시 보면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렘31:32)고 하여 인간은 언약을 깨뜨린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안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 나는 하나님의 신부가 될 자격도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노아의 방주에는 정결한 짐승과 함께 부정한 짐승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세상이 악하고 더러워서 물로 심판하시는데 왜 부정한 짐승까지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언약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인해 부정한 것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8장에 보면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창8:20-21)라고 하여 물이 감한 이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언약은 부정한 존재인 우리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심판에서 구출되고 생명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될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 믿음의 내용으로 채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인간의 행함과 열심으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믿음과는 전적으로 다른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거룩하신 언약 앞에 우리를 세워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랑은 또 나의 기쁨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오직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이 주께 기쁨과 영광이 되는 아름다운 인생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