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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 안에서의 연보(헌금) 
본문 /  고후 9: 6- 9

 

1. 헌금의 잘못된 이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 헌금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이사야서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는 말씀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헌금 액수를 따지거나 헌금을 했는지 또는 하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복에 차별을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헌금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행위나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하며 하나님께서 복으로 갚으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하는 헌금을 하나님과의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의 헌금이 거의 이런 수준으로 전락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교회에서 헌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의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는 구절을 인용하여 적게 헌금하는 것을 적게 심는 것으로, 많이 헌금하는 것을 많이 심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6절 말씀의 내용이 적게 헌금하면 적은 복을 받고, 많이 헌금하면 많은 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차단될 뿐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12:41-44)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다른 여러 부자들이 헌금한 것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하나님께 하는 헌금은 그 액수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부의 헌금 액수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입니다. 한 고드란트는 굳이 액수로 따지면 아주 적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과부의 헌금을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으로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자기 소유의 풍족한 중에서 아주 적은 액수를 넣었겠지만 이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는 굶어 죽어도 좋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만약에 과부가 자신의 생존을 먼저 생각한다면 생활비의 조금이라도 남겨 놓고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과부는 자신의 생존은 전혀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오늘 본문의 과부와 같은 헌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도 나름대로 많은 헌금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오늘 본문의 과부와 같이 ‘나는 굶어 죽어도 좋습니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한 적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 있었다면 주의 은혜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헌금을 하면서 뭔가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혹 오늘날의 교회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선동하면서 빚을 내서라도 헌금을 하게 하거나 또는 집을 팔아서라도 헌금을 강요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말하며 가르치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가 오늘 본문의 과부의 헌금을 이용해서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를 넣는 헌금을 독려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헌금을 강요하면서 ‘복을 받으려면 바쳐라’고 하는 것은 교인의 것을 갈취하려 하는 악한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아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바치지도 않은 사람에게 복은 주시지 않는다는 말로써 사람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치면서 복이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마음은 오늘 본문의 과부의 마음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자로 하여금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것을 독려하기 위하여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과부의 헌금은 생활비 전부를 넣는 헌금이 헌금답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는 예수님 앞에서의 자기 생존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으로써 나타낸 것입니다. 과부는 그 마음이 예수님에게 이끌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은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 외에 다른 이들은 그 마음이 자신에게 이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높음과 자기 자랑을 즐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운 존재입니까? 과연 우리들의 마음이 무엇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보다는 항상 자기 생존의 문제에 이끌려 살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성공에 마음 두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과연 천국에 간다는 것을 당연시 여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되면 그런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천국 가도록 돕는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의 의만 바라보는 것이 신자이고 또 그런 신자만이 주님에게로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 받았고 또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존재이기에 더 이상 다른 무엇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 예수님만으로도 만족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헌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말씀에 초점을 두면서 비록 수입이 적을지라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을 칭찬한 것으로 말하며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헌금에 힘을 쓰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가난한 과부가 헌금으로 인해 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결국 그러한 해석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까지도 자기 멋대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고 말하는데 이 구절 또한 어떻게 자기들을 위해 해석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은 헌금을 강조하기에 아주 적절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헌금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참된 헌금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헌금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지만 참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헌금을 통해서 말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열심히 헌금해야겠다’가 아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감사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우리를 헌금이라는 행위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끌어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고 말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넘치는 연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을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합니다. 2절에서 말한 것처럼 마게도냐 교회는 환란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라는 어려운 형편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형편만 생각한다면 풍성한 연보는 가능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서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안위부터 챙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면 그것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형편과 사정을 초월한 연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자기의 형편과 사정을 초월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형편과 사정 보다는 더 가치 있는 것을 속에 품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헌금을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의 의지와 뜻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헌금을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내 수중에 있는 돈을 내 뜻과 의지에 따라 헌금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헌금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헌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을 과연 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돈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말이 가난해도 연보는 넘치게 해야 은혜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환난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라는 형편과 사정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은혜이며, 그것이 마게도냐 교회에 넘치는 기쁨이 되어 연보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다시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부요한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의 구절을 따라 부요한 자라는 생각을 하는 수준일 뿐이지 실제로 부요한 자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헌금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헌금에 인색하게 되는 것은 돈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하면 그만큼 자기 수중에 있는 돈이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헌금에 인색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헌금 액수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난함으로 부요하게 된 은혜의 기쁨을 모른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재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물로 넉넉해지는 부요가 아니라 재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하늘에 속한 영광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그리스도 안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를 하늘의 것으로 부요한 자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이 하늘의 부요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고,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셔서 하늘 영광에 참여하는 부요한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신자에게 넘치는 기쁨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부요한 자라고 하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그로 인해 형편과 사정을 초월한 풍성한 연보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신자가 부요한 자임을 알게 되면 넘치는 헌금을 하게 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부요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보란 듯이 헌금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결국 부요라는 기쁨과 은혜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헌금이라는 돈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이해는 하나님이 원하심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헌금으로 부요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헌금하게 됩니다. 헌금은 주로 말미암아 이미도 부요한 자 되었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증상인 것입니다. 그런 부요함은 복음을 위하여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당연히 복을 기대하는 것도 없습니다. 헌금으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거나 교회에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자신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은혜로 인해 헌금하게 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헌금에 대한 신자의 믿음인 것입니다.

 

3. 부요한 자의 마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를 언급하는 것은 마게도냐 교회를 본받아 헌금에 힘쓸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참된 부요를 누리는 신자는 자기 형편과 사정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 예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을 언급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9:6)는 말도 헌금한 것만큼 받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헌금은 투자가 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헌금한 것만큼 받는다는 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많이 거둔다는 것에 관심을 둘 뿐입니다. 적게 거두는 것보다 많이 거두는 게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이 거두기 위해 많이 심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부요한 자라면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두는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5)고 합니다. 
여기서 연보, 즉 헌금을 미리 준비하는 것도 헌금할 돈을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요한 자로서 적든 많든 섬김을 위해 헌금할 마음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색함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헌금은 돈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해석됩니다. 헌금을 은혜로 바라볼 수 있는 그가 돈에 매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헌금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행위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헌금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부요한 자가 되었음을 아는가에 있습니다. 부요한 자로 형편과 사정에 매이지 않을 때 헌금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이고 자원하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주의 은혜와 사랑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이미 부요한 자 되었음을 알아 우리 안에 섬김과 봉사의 마음이 가득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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