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자의 봉사와 세상의 봉사
본문 / 민 4: 1- 3
1. 그리스도의 봉사
봉사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안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봉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에게 가르치고 강조하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의 봉사 여부로 믿음이 저울질 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만큼 봉사가 신앙의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에 의해 봉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봉사에 대한 이해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발생 되어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발생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을 했다 하더라도 봉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는 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라는 이름으로 했던 것들은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봉사의 흉내는 내는 것이었을 뿐이고, 우리의 상식 안에서 행해진 것들이었을 뿐이지 참된 봉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봉사를 한다고 할 때 봉사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섬김, 즉 봉사하기 위해 오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봉사는 자기 목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봉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발생 되어지는 봉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봉사가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는 예수님에게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봉사를 할 수 없으니까 봉사하겠다는 생각은 접고 마음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믿음에 의한 봉사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을 때 그 믿음이 어떤 봉사로 나타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봉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갖고 있을 때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레위인의 봉사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와 아론에게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집계하라고 합니다. 레위는 라반의 큰딸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인데, 고핫 자손을 집계하라고 하신 것은 고핫 자손 중 삼십 세 이상에서 오십 세까지의 남자를 계수하여 회막을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22절부터 보면 “22. 게르손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23.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민4:22-23)고 하여 게르손 자손도 동일한 이유로 계수하라고 합니다. 게르손은 레위의 장자입니다.
29절부터도 보면 “29. 너는 므라리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30.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민4:29-30)고 하여 므라리 자손도 역시 동일한 이유로 계수하라고 합니다. 므라리는 레위의 셋째 아들입니다. 이렇게 레위 자손의 삼십 세 이상에서 오십 세까지의 남자를 계수하여 회막에서 봉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봉사’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일곱 번, 구약에서 스물세 번 언급되는데 그 중 열 아홉 번이 민수기에서 언급되고 모두가 레위 자손의 회막 봉사를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봉사의 참된 의미는 레위인과 그리고 회막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8장에 보면 “11.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12. 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네가 그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 레위인을 속죄하고 13.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민8:11-13)고 말합니다.
요제는 제물을 흔들어 바치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손 대신에 레위인을 여호와의 몫으로 구분하여 바쳤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16절부터 보면 “16.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민8:16-17)고 합니다.
그러니까 초태생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인데, 이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초태생 대신에 레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취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린 이유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레위인을 요제로 드린다는 것은 바로 “레위인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라는 의미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헌신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레위인들이 하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14절부터 보면 “14.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민8:14-15)고 합니다. 그러니까 레위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이유는 결국 회막에 들어가 봉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의 회막에서의 봉사라는 것은 단지 레위인만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자손 전체에 미치게 하는 봉사인 것입니다. 레위인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의 봉사는 레위인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7절부터 다시 보면 “17.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민8:17-18)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모든 장자를 치던 날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회막에서 봉사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봉사로 말미암아 죄가 속하여 진 자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레위인의 회막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섬김,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다른 지파와 달리 기업을 받은 것이 없이 회막에서만 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없고 자기 생존을 위해 일할 수도 없습니다. 레위인의 생존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로만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레위인의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생존을 위해 회막을 떠나고 가정에서 복을 빌어주는 제사장 일을 하는 존재로 전락하기도 한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회막에서 봉사할 자로 구별되었는데 생존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려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인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또한 지금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신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존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를 버리고 사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발생되어 지는 봉사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봉사는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봉사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봉사는 예수님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레위인은 예수님 한분이시고, 우리는 장자로 오신 예수님의 봉사로 말미암아 죄 용서라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봉사를 생각하면 봉사는 단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봉사를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봉사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김받는 모든 일에 우리의 공로는 티끌만큼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만일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할 때에는 자신의 권위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와 통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것은, 봉사를 자신의 힘으로 한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했다면 내가 한 봉사는 없습니다. 따라서 봉사로 인한 자랑이나 비교는 봉사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죄의 흔적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런 봉사를 합니다. 결국 하나님으로 되어진 봉사가 아니라 내 힘으로 한 봉사이기에 자랑 되어지고 또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봉사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한다면 우리가 말을 하든 봉사를 하든 증거되는 것은 하나님이지 본인은 결코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봉사 안에서 가능한 봉사이며 세상의 봉사와 다른 점입니다.
3. 세상의 봉사와 신자의 봉사
세상의 봉사는 자신의 힘과 열심과 정성으로 합니다. 그래서 봉사하면서 봉사하는 자신을 생각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또한 자신의 봉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월감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에서 헌금을 하든 또는 봉사의 일을 하든 모든 것을 자신이 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세상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인한 봉사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님을 전제합니다. 자신이 수고한 일이라 해도 수고하게 하시고 또 수고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이 계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남는 그것이 믿음으로 인한 봉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봉사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고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투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위해 봉사했으니 너희는 보답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봉사하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보답의 차원에서 봉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것으로 또 자기의 힘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부터가 성경에서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봉사가 투자가 아니듯이 신자의 봉사 역시 결코 투자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없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해도 개의치 않아야 하는 길로 가는 것이 신자의 봉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봉사의 길에서 신자는 예수님의 봉사를 만날 수 있고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봉사로 인해 믿음 좋다는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고자 한다면 자신의 이름만 높아질 뿐 예수님의 봉사는 잊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애당초 예수님의 봉사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속셈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봉사를 했다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봉사했을 때 뭔가 기대하게 되는 자신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만 자랑하고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는 자신이 깨닫게 된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까지도 은혜와 사랑에 붙들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봉사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의한 봉사입니다. 이 은혜에 붙들려 매일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