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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맡기신 전도

본문 / 1: 1- 4

 

1. 잘못된 이해

한국교회만큼 전도에 진심인 나라는 없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나갈 때부터 듣게 되는 말 중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전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 성장입니다.

교회가 전도를 강조하는 이유를 교회 성장을 위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는 교회 성장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교회가 말하는 전도가 성경의 의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교회 성장이라는 고리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 성장을 향한 목사의 욕망에 의해 전도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사명이라는 명목과 함께 반드시 실천해야 할 법으로 강조되면서 신자에게 무거운 짐으로 안겨지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전도가 잘 된다. 또는 안 된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말의 의미가 결국 교인 수가 늘거나 또는 늘지 않는 것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분명 한국교회는 전도에 대해 성경에서 벗어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사도도 교인 수의 확장에 의미를 둔 전도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고 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고 하며, 또한 요한일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고 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금 읽은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라고 말하고 또 그것이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뭘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지 못하면서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고 무조건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바른 믿음에서 벗어나는 잘못됨을 많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도하러 오셨다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러 왔다는 것은 십자가 말고 전도라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까? 전도는 한자어로는 전할 에 길 라고 하여 길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 된 우리가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전도는 장차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이 세상에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심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전도와 오늘날의 교회의 전도를 비교하면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날의 교회의 전도는 교세 확장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4:42-44)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 무리들은 귀신을 나가게 하시며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좋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러한 능력은 전도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이고 또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많은 기적을 베풀어서 더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이야말로 꿈에서라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곳을 떠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 된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같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신자이고 또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된 신자는 무엇이 교회이며, 무엇이 선교이고, 무엇이 구원인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걸어가는 주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이 일에 마음을 두고 또 그 일이 오늘 우리들의 일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며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전도가 무엇인가를 예수님의 전도를 통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도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전도는 교회 밖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1:39)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전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곳입니다. 그런 회당에서 전도하셨다는 것은, 오늘날 소위 믿는 자들이 모인다는 교회에서 전도하신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신자가 자신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전도를 오해한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 때문에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교회에서의 설교는 과연 무엇입니까? 설교는 전도가 아닌 것입니까? 그러나 설교 역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즉 전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교회를 나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나올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전도는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고, ‘나는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히 그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인간이 왜 예수님께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적인 전도는 인간은 죄인이며 사망에 처한 존재임을 전해야 하고, 예수님이 그러한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는 것만이 우리가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전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바른 도를 증거 하는 전도는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게 할 뿐만이 아니라 죄의 용서와 깨끗함을 입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오도록 합니다.

이어지는 40절에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40)라고 하여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내용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전도로 인한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병환자 말고도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앞에 36절부터 보면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1:36-37)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주를 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찾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다른 데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나병환자처럼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을 보면서 깨끗함을 입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좋아서 예수님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오병이어의 놀라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은 “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6-27)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왜 찾는가가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해 찾는 그들을 외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읽은 38절을 다시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회당에서만 전도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전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마을에서 전도하셨을 때에는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는 단지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함을 입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전도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들은 신자에게 있어야 할 성령의 역사는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깨끗케 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함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원하는 것 처럼의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잘 살게 해줄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깨끗케 해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전도의 참된 열매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31.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2)고 말씀하신 것처럼, 전도는 인간은 의원이 필요 없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의원을 찾아가야 살 수 있는 병든 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전도로 말미암아 자신이 병든 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함과 질병을 대신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에 인간의 욕망이 개입됨으로 인해서 전도의 목적이 교회 학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기들 나름대로의 전도 목적과 목표를 정하고는 교인들에게 일 년에 한 사람씩 전도하라고 강조하는 것들이 과연 예수님이 하신 전도와 일치하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단지 자신에게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전도하셨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라면,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전하는 것은 미련한 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나오게 할 만큼의 매력 있는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볼 때 미련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도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나 믿을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자신의 전 인생을 다해서 따르고자 하는 인간이 등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를 구별하는 능력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도에서 십자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 성장만을 바라봅니다. 교인들을 훈련을 잘 시켜서라도 전도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교회를 부흥시키고야 말겠다고 하는 인간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구실을 붙여서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전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전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가 분명 신자의 사명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된 신자라면 그 은혜를 지체와 함께 나누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은혜를 함께 나눔으로써 형제자매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도록 돕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전도는 예수 믿으십시오라는 말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진리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곧 이웃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하늘나라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복된 신분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전도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도는 바로 우리 주의 십자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하는데 효과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5:11)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거북하고 듣기 싫은 말로 다가오기 때문에 십자가로 인해 박해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전도가 교회를 성장하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거부하지 않고 또 박해를 받는 십자가가 아닌 박해 없는 십자가를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1:3)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도는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씀합니다.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전도, 즉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냄으로 인하여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교회가 세상 곳곳에 세워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음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사도는 이 전도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전도의 사명을 맡은 사도가 갈 길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길이기 때문에 전도를 교회 성장과 연결하는 것은 결코 불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에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지역이나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기 위해 십자가의 도가 전파되는 것이고, 십자가의 도가 전파되게 하셔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에 결국 전도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확장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 수 또는 교회 수의 증가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세력과 교회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미화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그처럼 양적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양적으로 미미한 것은 도리어 하나님 나라로서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자라가야 한다는 말도 다르지 않습니다. 계속 자라가야 한다면 늘 현재는 미완성이고 부족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었고 온전한 충만의 상태이기 때문에 확장되어야 하거나 또는 채워야 할 것이 없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전도 또한 성경이 말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전도가 무엇이고 전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오늘날의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도의 실상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전도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전도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전도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고 그리고 이제 그 전도를 사도에 맡겼으며 사도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가 간 길로 우리 또한 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도에게 그 전도를 맡기신 것처럼 우리에게 똑같이 맡겨졌음을 잊지 않아야만 합니다.

사실 전도는 아주 간단합니다.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유익과 욕망이 걸러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전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알게 된 것이 있고 우리에게 전파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교회에 대한 생각으로 교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다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은 복음일 것입니다.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면서 그 복음이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를 어떤 방법이나 활동 그리고 실천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복음으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 말이 가장 쉬운 말이면서도 어렵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무슨 특별한 행함의 실천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냥 복음으로 사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우리가 계속 복음 안에서 알아가야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노아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노아의 전도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오늘 우리가 심판에서의 구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전도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나라의 백성으로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거하시며 매일의 삶을 누리며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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