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본문 / 출15:22-26
1. 언약 백성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입니다. 성경도 옛 언약인 구약과 새 언약인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언약 백성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현실에 대한 개념이 언약의 시각, 즉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시각으로 세상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과 동일하게 자기 육신을 중심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언약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일을 돕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현실들은 우리 육신의 편함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한 도구와 기회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믿는 자는 현실에 대한 개념이 언약적 시각으로 바뀌는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항상 자신의 생존 문제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증거되는 것보다 자기 육신의 모든 일이 잘되는 것에 더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언약의 시각으로 자기 현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현실의 좋고 나쁨에 따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에 의해 주어지는 새로운 현실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애굽에서 430년을 거주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거주했다는 것은 애굽이 이스라엘의 현실로 자리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나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현실로 인식하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새로운 현실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기존 현실관을 그대로 가진 채 새로운 현실관이 요구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새로운 현실관이 요구되는 약속의 땅 또한 애굽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에게 박혀 있는 애굽에서의 현실관, 즉 자기 육신이 중심이 된 기존의 현실관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하시고 그들에게서 버려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을 그들이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 치료하는 여호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15:26)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문자대로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규례를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규례를 지킬 수 없는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규례를 지키라는 말에 담겨 있는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자신이 규례를 지킬 수 없는 자 그래서 죄인이며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치료하는 여호와 앞에 나간다면 그는 치료가 필요한 병자로 나아간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을 치료가 필요한 병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즉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치료하는 여호와’는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병자의 상태를 자신의 현실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에 의해 의원이신, 즉 치료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육신의 질병, 육신의 치료와는 무관한 말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예수님이 또는 선지자나 사도들이 신적 능력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질병이 치료받은 내용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을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는 분으로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질병이 고침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말이 참되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질병이 치료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는 현재 건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치료하는 여호와’는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기 위해 계시는 분이 아니니까 병 나음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병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당연히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몸의 가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 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바울은 몸에 가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병 나음을 위해서나 하다못해 부자 되게 해달라는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을 알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러한 기도는 믿음에서 벗어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그처럼 자기 욕망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병 나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부자 되게 해 달라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기 정당성을 삼을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병 나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또 부자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신자 된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마음에 그런 생각이 없다고 말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이 복음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육신의 병이 낫고 부자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존귀하고 복된 것이 있음을 하나님이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히 육신이 중심이 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하는 현재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으로 인한 기도인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치료를 받아야 할 병든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치료가 필요한 병든 자’라는 자기 인식인 것입니다. 병든 자라는 자기 인식이 없다면 치료하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시험
오늘 본문에 보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사흘 동안 걸었음에도 물을 마시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마라라는 곳에 도착해서 물이 있는 웅덩이를 만나긴 했지만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합니다. 물을 마시지 못해 고통을 겪게 된 이스라엘은 결굴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모세가 그 나무를 들어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황은 물이 달게 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26절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25절부터 다시 보면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15:25-26)고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되어 마셨으면 이스라엘도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을 시험하겠다고 하시면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26절에서 말하는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급 시키실 때 애굽 땅에 내린 열 재앙 때 있었던 질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못하면 애굽에 있었던 질병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애굽과 동일하게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광야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모습은 애굽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의 현실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시면서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아침까지 두었다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을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백성 중 어떤 사람은 혹시 안식일에도 만나가 있을까 하여 거두러 나가기도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도 애굽의 질병이 내려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으로 갚지 않으시고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각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약속의 땅이라는 현실을 해석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규례를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하나님의 치료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은 죽을병에 걸린 상태에 있습니다. 시한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면서도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책임지는 길로 갑니다. 구원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발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믿음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덕적인 선한 삶에 마음을 둘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는 자신의 죄를 알게 하시고,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근거와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료하시는 여호와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게 된 사람만이 예수님을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병든 자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성령이 오셨다면 그 증거는 자신이 병든 자임을 알고 자기가 죽인 예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치료자이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우리의 실체를 알기에 감사와 감격에 겨워 주를 노래합니다. 이런 삶이 주안에서 치료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임을 알아 매일의 삶이 받은바된 은혜와 사랑에 감사의 찬양이 넘치는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