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리로 구원받게 하심
본문 / 살후 2:13-15
1. 빌라도(우리)의 진리
진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하여 유대 총독인 빌라도가 자신에게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린 이러한 빌라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18:34)라고 되묻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유대인의 왕으로 보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해 한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해 빌라도는 35절에서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가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18: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유대인이 아니니 네가 유대인의 왕이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으니 다만 네가 무슨 잘못을 해서 여기로 끌려 왔는지만 말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지은 죄가 어떤 것인지 밝혀내서 처벌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라도를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행여 현재 우리들의 신앙이 바로 이 빌라도와 같은 수준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으면서도 예수님이 왕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어떻든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온 분이라고 해도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니까 예수님과 연관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일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유대의 총독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이 자기 신상에 좋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소 사건에 대해 일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의 생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서 말한 생명은 하늘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죄인으로서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신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보며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됨을 깊이 자각한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오로지 생명을 볼 뿐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하게 되는 것은 생명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위치(직무)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처럼 예수님이 죄가 있는가 없는가 만을 살필 뿐입니다. 유대의 총독이라는 자기 입장에서 예수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역시 현재 처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빌라도와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보이기보다는 자신을 도와주고 이롭게 해줄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잘못된 관계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러한 잘못에 처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 말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뿐입니다. 내 입장이 이러니 나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것은 분명한데 나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서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 세상 나라의 일을 구하고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관심은 세상 속에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세상 나라의 모습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나의 왕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무지이며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신자의 나라는 분명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새로운 나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 나라에 처한 입장을 고수하며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과 죄인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18:37)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여전히 예수가 왕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증거하러 왔다고 말씀하고 진리에 속한 자만이 예수님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 그까짓게 뭐냐?’는 식의 조롱의 말인 것입니다. 즉 빌라도에게는 진리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진리에 대해 답하셨다면 빌라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빌라도가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으로 유대의 총독이라는 자신의 위치조차도 진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이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 유대인의 요구를 들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예수라는 한 사람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진리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진리는 무엇입니까? 혹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반응하는 빌라도가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말씀하는 진리는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자리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진리를 원하고 그러한 진리를 사모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에게서 불의함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바라볼 것은 천국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리이며 이 진리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진리
성경이 증거 하는 진리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합니다. 여기 말씀한 것처럼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총독이라는 신분을 넘어서 로마 황제라는 신분과 세상에서의 최고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구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며 하찮은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진리를 아는 것에 인생의 참된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굴복할 이유도 또 세상의 권세와 힘으로 싸워 이김으로 예수님의 힘을 과시할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세상에 속한 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속한 자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께 속했다면 우리 역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세상의 권세에 굴복할 이유도, 세상의 권세와 힘으로 싸울 이유도 또 그런 세상의 힘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서는 진리를 안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또 믿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는다고 하는 신자에게 있어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즉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를 택하셔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의 존재인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바로 이 진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리를 믿게 된 것으로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큰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선물을 받은 자로 그 선물의 가치를 아는 자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물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로 인한 구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인정하는 세상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받음으로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며 생존하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끌어낸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은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끝날 곳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또 진리가 없어도 세상의 것만 있으면 족하다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한 세상을 진리 안에서 바라본다면 무엇이 보일 것 같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믿는 자인 우리로 세상을 벗어나야 하는 곳으로 바라보게 하고 또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온 마음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돈으로도 해결될 수 없고 어떤 힘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하나로 일괄 해결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을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부요하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알고 믿는 신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 또 나타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실상은 참으로 초라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이렇게 가난할 수 없는 것이 실상인 것입니다.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인 수와 상관없이 오직 세상적이고 외적인 풍요만을 이루고 싶어 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그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 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어리석고 가난한 모습일 뿐입니다. 교인들 또한 예수님은 자랑하지 않고 종교 활동이나 취미생활에 불과한 실천이나 행함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모습들이 초라하기가 그지없는 모습일 뿐입니다.
3. 바울(신자)의 진리
그런 우리에 비해 사도 바울의 존귀한 가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직분을 소중히 여겼고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하는 등의 모든 형편에서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환난보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바울 사도에게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바울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오직 진리에만 못 박아 두고 있는 이 모습이 진리의 가치와 소중함을 아는 신자 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감히 진리를 안다는 말할 수 조자 없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진리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봅니다. 진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기에 진리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깊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의 세계에서 벗어남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세상은 자기 충족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자기 충족을 통해서 만족을 누리는 것을 기쁨과 행복으로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결말은 언제나 환상과 허무로 끝날 뿐입니다. 즉 자기 충족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환상적 행복을 좇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보이는 것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다릅니다. 다른 이유는 신자에게는 충만이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충만으로 자리하기에 세상의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가진 부요이며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진리는 세상으로부터 천대를 받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교회로부터조차 환영받지 못하고 천대를 받습니다. 교회는 진리보다 교회 부흥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리가 함께 하지 않고 진리를 몰라도 우리가 사는 문제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진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진리와 상관없이 돈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에게도 진리가 아니라 교회 부흥이 행복의 조건으로 자리합니다.
하지만 그 결말은 실패일 뿐입니다. 설사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해도 결말은 실패로 진단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존재인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에 있게 하는 힘은 진리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오고, 진리가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가능한 기적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고 진리로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모든 것이 진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진리로 인해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로 사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신자에게 자리함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리로 인한 부요를 드러내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이 진리로 인한 통치와 다스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안에서의 만족과 부요함을 맛보며 누리며 감사와 찬양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