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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열심

본문 / 2:13-22

 

1. 열심에 대한 오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은 무엇으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우리에게 있는가부터 묻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연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있습니까? 그리고 있다면 그 열심은 무엇으로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열심을 부지런한 어떤 행동으로 이해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관련되고 교회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행할 때 우리는 열심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봉사나 충성 또는 열심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봉사 충성 열심이 어떤 특정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봉사나 충성 또는 열심은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에게만 주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병에 걸려서 병상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돈 한 푼 없어서 제대로 헌금도 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에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봉사와 충성이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이라면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도, 헌금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서도 보여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만약 봉사와 충성과 열심이 건강하고 돈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병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난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병들게 하시고 가난하게 하셔서 봉사와 충성을 못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만큼은 충성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았다고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우리의 행함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행함으로 이해한다면 몸의 조건상 행함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열심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열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와 충성에 대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결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열심으로 말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도든 헌금이든 구제든 금식이든 무조건 많이 하는 것을 열심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사와 충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이 있는 것을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열심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성전

오늘 본문은 흔히 예수님의 성전 청결이란 제목을 붙여 부르는 사건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울 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날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성전에 이러한 장사꾼들이 앉아 있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규례를 보면 제물로 바칠 짐승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물로 가져온 짐승들을 심사를 했던 것입니다. 즉 제물로 쓰여질 만한 것인가를 따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물의 심사에서 탈락이 되면 참으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제물을 집에서 가져오지 않고 성전 안에서 파는 것을 샀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판매하는 제물이라면 심사에서 탈락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나 양을 파는 장사꾼들은 제물에 대해서 폭리를 취한 것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배를 핑계 대고 예배하는 자들을 착취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소나 양을 구입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비둘기를 바치도록 말씀하셨는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전혀 무시해 버리고 비둘기조차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사고파는 성전에는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30:13)라고 하여 성소에 반세겔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규례대로 성전에 제사하러 온 사람들은 성전 세를 바쳐야 했는데 오직 유대 화폐로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이 있게 된 것이고, 돈을 바꿔주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엉망이 된 성전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이나 소를 다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2:18)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표적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을 수 있는 권리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21절에서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21)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곧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를 함으로서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사람들을 쫓아내실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은 예수님이 곧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내용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옳지 못하게 보시고 행동하신 것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예수님은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 집착하신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마음대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인간이 마음대로 허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결국 지금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든지 인간의 손으로 허물어질 수 있는 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즉 건물이 성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가 성전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전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계시가 실체로서 오신다면 구약의 성전은 그 역할을 다 마친 것이 됩니다. 결국 그때까지의 성전은 한낮 건물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인간이 허물어 버릴 수 있는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오직 성전에 나와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성전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특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즉 건물 자체에 무슨 신비한 현상이나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가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불의한 인간의 죄를 씻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허물과 불의함을 짊어지고 대신 죽는 제물의 피가 있었기 때문에 제사가 드려지는 곳은 거룩하고 정결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성전에서 거하실 수 있는 것은 성전의 정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결은 제물의 피로서 유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서 무엇 때문에 불의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가능하게 되어졌는가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음에는 눈에 보이는 건물인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라 해도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불의함을 대신해서 피 흘리실 메시아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 성전으로 세워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 나와서 제사만 드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의도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선지자로부터 철저한 책망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들고나오는 제물에는 관심이 없으셨고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말씀은 너희가 성전을 헐면 내가 그것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는 능력을 보여주겠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헐어지는 성전과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며,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질 성전이 있는데 그것이 참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는 뜻이 되고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손으로 46년간 지은 것을 단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으로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2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3. 참된 열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심은 구제를 많이 한다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식의 열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는 열심을 보이셨습니다. 참된 성전을 세우시려는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기억했다고 하는 성경 말씀은 시편 69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69편을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69:9)고 합니다. 이 시편 69편은 복음서에서 자주 인용되던 구절입니다.

예수님도 시편 694절의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69:4)는 말씀을 인용해 요한복음 15장의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15:25)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1절의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69:21)라는 말씀 역시 요한복음 19장의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19:28)라는 말씀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 69편은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시편 699절의 말씀은 다윗의 여호와를 위한 열심의 결과로 인해서 다윗 자신에게 해가 미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성전을 위하는 예수님의 열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해를 입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몸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허물어지게 되고 예수님은 그 몸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문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허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심은 인간의 마음에 세워져 있는 자기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물고 대신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이 열심이 있었기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신자의 열심이 앞서 말한 대로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는, 즉 종교적인 행위가 많은 부지런함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보여준 잘못된 열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월절이면 만사를 제치고 성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열심을 보였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편함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열심을 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교회에서 행하는 열심 역시 그런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우리의 삶에 헛된 성전을 허물고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회복에 대한 열심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열심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우리 속에 참된 성전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이며 열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의 열심은 대개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종교적 열심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자기만족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으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심은 바로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허물고 참된 믿음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심이기도 했습니다. 참된 것을 세우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열심으로 인해서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에게 삼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심은 중지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시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에 보면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10)고 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를 보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런 말씀을 만났다면 날마다 허무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세워진 헛된 것을 허무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주어진 참된 생명을 두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것은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헛된 것을 세우고 지키기에 열심입니다. 그런 우리의 헛된 열심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시기를 바랍니다. 헛된 것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열심으로 인해서 참된 생명이 허물어집니다. 자신을 위한 열심 때문에 대신 그리스도가 허물어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열심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열심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헛된 것이 뽑혀진 그 자리에 이제 참된 것으로 건설하고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분으로 자리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날마다 헛된 것을 허무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우리가 주안에서 살아가야할 복된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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