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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람의 거듭남

본문 / 3: 1- 8

 

1. 믿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이라면 대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 또는 과연 이런 믿음으로 천국에는 갈 수 있을는지,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과 고민이 신앙인으로 하여금 믿음에 대해서 긴장을 가지고 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믿음을 성경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생각은 깊이 주의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다음부터는 믿음이 우리를 붙들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서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믿음을 계발하고 향상시키고 더욱 자라게 해야 할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서 향상시키고 자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인간이 노력에 의해서 자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인간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인간이 믿음을 자라게 할 수 있다면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지도 않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믿음이 주어진 것이나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것에는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위와 노력, 그리고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 믿음인데, 어떻게 우리들의 노력과 의지로서 이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하고 지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해서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자라고 지켜지는 믿음이라면 결국 자랑과 칭찬은 인간을 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인간의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때 믿음은 그 자체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질과 분량이 다르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차별되게 믿음을 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남보다 적은 믿음을 받은 자라면 부족하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논리가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자기 노력으로 자신을 건지려는 노력을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넉넉합니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만으로 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붙들고 건졌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며 우리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믿음이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의 문제 역시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육의 사람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3:2)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관원이라면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유대 의회의 회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안다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니고데모 개인이 아니라 다른 바리새인들도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목격을 했거나 소문으로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한 니고데모의 시각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으로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초자연적인 이적을 일으키는 선생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보게 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다만 행하신 표적을 보니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에 대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에 대한 니고데모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나 순종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인간의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어지는 것이 아닌 영에 의한 창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즉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위로부터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되어지고 위로부터 되어지는 것이라면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절대적으로 언급해서는 안 될 문제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 되어지는 거듭남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은 니고데모에게서 인간의 행위를 높이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가 단순히 바리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행위를 높일 것이라고 추측하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속, 즉 중심까지 보시는 분이시지만 사실 니고데모의 속의 중심은 이미 그의 말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으로만 봤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능력을 받았기에 신기한 이적을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예수님의 신기한 힘을 증명하기 위한 표적이 아닙니다. 표적이란 말은 요한복음 2장의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처음 나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고 하여 가나 혼인 잔치를 첫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을 처음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장차 행하실 일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이적이라는 의미에서 표적이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기 전에 내 때를 말씀하신 것은 포도주를 만드셔서 나누어주시는 일을 단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보지 말고 예수님의 때인 십자가의 고난의 차원에서 이해하라는 의도이십니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잔칫집에 큰 기쁨을 주시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이 성취될 때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이 나누어지고 결국 참된 기쁨을 얻게 될 것을 계시하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서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표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때가 성취됨으로 인해서 성령이 오시고 그로 말미암아 죄악으로 더러워진 우리가 깨끗함을 입게 된다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참된 관계에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적에서 신기한 능력만을 봅니다.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을 보니까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뿐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육의 모습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그 이상의 것, 즉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육이 아닌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행한 일을 보고 판단하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는 곧 율법의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수준이란 행한 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행위로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영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산다는 것은 행위를 높이고 행위를 가지고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되어짐을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인간의 행함을 버리지 못한 수준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행함을 가졌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되고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한 요건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지금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해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결국 인간의 그 어떤 위대한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태어난 자 되게 하기 위해 또 천국을 보내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거룩한 행위를 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고 인간의 자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듭남을 인간의 자질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성격도 달라지고 믿음도 있고 열심과 봉사와 충성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고데모의 수준인 것입니다. 이처럼 육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것도 육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4)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거듭남에 대해서 부정하는 말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나 위로부터라는 말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고 순전히 육적인 시각에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자라서 늙기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야말로 참된 진리를 볼 수 없는 소경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율법을 단지 행함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모든 사람의 시각입니다. 특히 자신이 노력과 의지로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율법을 받은 자이고 또 열심히 율법을 행하고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국이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거듭나야만 천국 간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물과 성령으로

이처럼 육의 시각만을 보여주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탄생은 물과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그런데 왜 물이 개입되는 것입니까?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면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물을 성령과 함께 말씀하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물세례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목사가 교회에서 행하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이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으로 되어지지 않음을 말씀하면서 물세례라는 인간의 행함을 언급하신다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가 행하는 물세례는 결코 신자가 천국을 가는데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직접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천국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것은 물과 성령을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물로 난다는 것이나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를 다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세례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서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물세례를 베풀면서도 물세례 자체를 강조하고 의미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1:33)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의 물세례는 요한이 독자적으로 만든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분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분이 요한에게 말하기를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이 있음을 아는 가운데 물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의식한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물세례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물세례의 실상은 성령 세례이며 그런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인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물세례인 것처럼 성령 세례는 죄인된 우리를 위로부터 다시 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물세례는 성령 세례가 이렇게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고 말합니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은 육일뿐입니다. 육으로서 영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죄악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입은 성도는 육이 아니라 영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거듭나지 못함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됨과 육신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이나 의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활동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 역시 인간의 의지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기쁨에 의해서 활동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 6절부터 보면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6-8)고 말씀합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인간의 능력이 바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바람이 원하는 대로 불뿐입니다. 이처럼 성령도 인간의 힘과 인간의 뜻으로 통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믿음과 생명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 다만 그 흔적이 보일 뿐입니다. 성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하신 그 흔적과 증상만 느껴지고 보일 뿐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뜻과 원함에 의해서 활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믿음은 자기 소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은 자기 소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에 다스림 받고 있는 흔적입니다.

성령의 흔적은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신자들의 행함과 고백으로 증거됩니다. 즉 같은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육으로 태어난 자는 자기 소리, 즉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는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활동하기에 성령에 의해서 영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에 성령에 인도받는 삶입니다. 어떻게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가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일이지만 성령이 역사하고 계심은 우리의 삶에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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