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0,580
오늘 : 279
어제 : 287

페이지뷰

전체 : 78,736,898
오늘 : 1,331
어제 : 1,640
조회 수 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다섯째 인

본문 / 6: 9-11

 

1. 복음과 힘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은 간단히 말해서 신자는 세상에 의해서 죽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자 보게 된 환상은 제단 아래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외치는 장면입니다. 죽임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병 고치는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말씀의 증거라면 말씀의 증거를 가진 자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다. 기적의 예수님을 환영을 한 것입니다.

기적의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한다면 뭔가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세상은 인생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예수님을 원합니다.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고 쓸데없는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신자가 가지고 있는 말씀의 증거가 기적이고 병 고치는 은사라면 세상은 신자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증거는 그리스도요 십자가입니다. 결국 말씀을 증거를 가진 신자가 외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것과 같은 말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듯 역시 신자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22)고 하며 또 요한복음 15장에도 보면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신자는 세상에 의해서 죽는 자라는 말씀은 신자들의 얼굴 표정을 밝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둡게 하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힘이 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말씀처럼 말씀의 증거가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죽였고, 왜 죽였는가를 알기 때문에 말씀의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신 역시 세상으로부터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금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말씀이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죽는다는 것이 나의 당연한 운명임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힘인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 세친구가 신상에 절하지 않고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용기 있는 행동이고 힘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상한 힘이 솟아나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믿어졌을 뿐입니다. 설사 불에서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것이 믿어졌기 때문에 불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그 힘을 얻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면 뭔가 색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줄로 생각을 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는 신자를 주와 함께 죽는 자리로 인도해 갑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보복의 외침

오늘 본문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제단은 제물들이 죽임을 당하여 흘린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 제단 아래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피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피가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말씀의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그들의 피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외치고 있는 것은 자기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보복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라고 합니다. 이것이 죽임을 당한 자들의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 외침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고 하신 것이나,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한 것과는 어떻게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나 스데반은 하나님에게 보복해주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제단 아래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하나님이 보복하여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있는 창세기 4장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는 말씀을 먼저 이해를 하셔야만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즉 자기 자존심이 아벨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단지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에게도 대항하고자 하는 인간의 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에게 호소한다고 합니다. 이 호소가 과연 아벨이 자기 개인을 위한 복수의 호소이겠습니까? 아벨의 핏소리의 호소는 개인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에 대한 보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나 스데반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은 자신을 위한 보복을 원치 않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고, 오늘 본문에서 복수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발하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보복해달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적에 대한 보복이지 개인의 적을 향한 보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신자들의 외침에 대해서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6:11)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보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끝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끝을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수가 채워질 때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서 보복을 하십니다.

보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백성들, 말씀의 증거를 가진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피 흘린 신자들을 증거물로 내세워서 세상을 향한 보복을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3. 보복의 대상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은 참으로 문제투성이입니다. 자기 자존심으로 사는 세상이고, 자신의 선악체계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신이 유익이 되면 기뻐하고 유익이 되지 못하면 반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기에 자기를 주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가가 안정되고 나라가 부강해지고 먹고살기가 편해지면 그것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십니다. 자기 인생에 보탬이 되는 것만을 찾아다니는 세상은 전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무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세상이 죽임으로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게 되면 하나님의 보복이 세상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현실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끝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을 보고 사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상의 끝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복수하시는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은 놀랍게도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잘못은 복음을 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죄의 자리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을 방패로 해서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아벨을 죽인 가인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산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 별문제가 없기만을 원했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문제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를 않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말을 듣기를 싫어하고 그저 십자가의 은혜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복을 받아야 할 복수의 대상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를 알아야 왜 내가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알아야 우리를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세상에서 어떻게 살까?'에 미련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 끝을 아는 자가 과연 그 과정에 의미를 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복수하시는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한 힘으로 우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으로 남아야 할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는데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은 신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며 또 신자가 그런 일을 당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세상으로부터 환영받는 예수님과 그렇지 못한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말씀이 힘이 되는 자들은 누구라고 합니까?

 

4.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피가 제단 아래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5. 스데반의 기도와 오늘 본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이며 또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죽임을 당한 신자들의 외침에 대한 응답은 무엇이며 또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7. 세상을 향한 세상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의 심판을 안 신자의 시각은 어떠해야 하며 또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가 자칫 범하기 쉬운 잘못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하나님 앞에 심판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신자의 증상은 무엇입니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93 2023 11월 12일 / 요한복음 22. (요 4:39-42) 우리가 친히 듣고 앎이라 관리자 2023.11.12 11
692 2023 11월 12일 / 요한계시록 37. (계 10:1-11) 손에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 관리자 2023.11.12 9
691 2023 11월 5일 / 요한복음 21. (요 4:27-38) 예수님의 양식 관리자 2023.11.05 10
690 2023 11월 5일 / 요한계시록 36. (계 9:13-21)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관리자 2023.11.05 9
689 2023 10월 29일 / 요한계시록 35. (계 9:12) 계속되는 화 관리자 2023.10.29 12
688 2023 10월 22일 / 요한복음 20. (요 4:19-26) 영과 진리의 예배 관리자 2023.10.22 11
687 2023 10월 22일 / 요한계시록 34. (계 9:1-11) 사단의 권세 관리자 2023.10.22 14
686 2023 10월 15일 / 요한복음 19. (요 4:11-18)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 관리자 2023.10.15 18
685 2023 10월 15일 / 요한계시록 33. (계 8:11-13) 하나님의 원칙 관리자 2023.10.15 12
684 2023 10월 8일 / 요한복음 18. (요 4:9-10)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관리자 2023.10.08 12
683 2023 10월 8일 / 요한계시록 32. (계 8:6-13) 천사가 나팔을 불매 관리자 2023.10.08 8
682 2023 10월 1일 / 요한계시록 31. (계 8:3-5) 성도의 기도 관리자 2023.10.01 45
681 2023 9월 24일 / 요한계시록 30. (계 8:1-2) 나 관리자 2023.09.24 13
680 2023 10월 17일 / 요한복음 17. (요 4:1-10) 사마리아 여인 관리자 2023.09.17 13
679 2023 9월 17일 / 요한계시록 29. (계 7:13-17) 환란에서 나온 자 관리자 2023.09.17 8
678 2023 9월 10일 / 요한복음 16. (요3:31-36) 위로 부터 오신 이 관리자 2023.09.10 9
677 2023 10월 10일 / 요한계시록 28. (계 7:9-12) 구원의 노래 관리자 2023.09.10 9
676 2023 9월 3일 / 요한복음 15. (요 3:22-30) 요한의 기쁨 관리자 2023.09.03 12
675 2023 9월 3일 / 요한계시록 27. (계 7:4-8) 인 맞은 관리자 2023.09.03 8
674 2023 8월 27일 / 요한계시록 26. (계 7:1*-3) 세상의 현 관리자 2023.08.27 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