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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한의 기쁨

본문 / 3:22-30

 

1. 인간의 욕망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합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또는 자신이 활동하는 삶의 범위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대우 받고 싶어하고 우뚝 서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알아준다는 것으로 흐뭇해하고 기뻐합니다. 이처럼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한 것은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라고 요청하는 제자의 어머니나 또 마가복음 10장에서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라고 요청하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집단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앉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보다 높아지고 타인으로 인해서 자신이 소외될 때 타인에 대한 시기심과 미움과 저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십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 신자인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또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로 선택받아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자는 항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소외되어야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이처럼 그리스도만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은 그리스도 뒤로 사라지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2. 요한과 제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유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유대 땅에 유하시면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비록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3:22)고 하여 예수님이 세례를 주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세례를 주셨다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실제로 세례를 주신 것이 언급되어 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은 구원과 연관된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행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2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행하신 것처럼 언급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4:2)고 말합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친히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마음대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2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주신 것으로 언급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주고 계실 때 근방 애논이라는 곳에서도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25절에 보면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3:25)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각기 베푸는 의식을 보고 한 유대인과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정결 예식에 대해서 변론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정결 예식은 깨끗함을 입게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 가운데 과연 예수라는 사람이 베푸는 세례가 나으냐,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나으냐?’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론으로 인해서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찾아와 26절에 보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3:26)라는 불만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의 입장에서는 요한이 중심적인 인물이 됨으로서 자신들 역시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럼으로 자기 스승이 다른 사람에게 밀리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라는 사람보다 자기 스승인 요한이 세상에 먼저 온 사람이고 또 세례 역시 예수보다는 자기 스승이 더 선배인데 그러한 요한에게보다도 뒤늦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군중들이 몰리는 것을 볼 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심정을 우리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물건을 파는 두 가게가 있는데 한 가게로만 손님이 몰릴 때 다른 가게 주인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헤아려본다면 요한의 제자들의 그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항상 내뱉는 불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도 내 교회 근처에 다른 교회가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다만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과 같은 속성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말씀의 중요성보다는 내 교회보다 저 교회로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다는 것으로 속상해하는 모습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스승이 증거하던 예수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인기가 추락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저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데 내 교회는 왜 사람들이 늘지 않습니까?’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잘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것까지도 빼앗아서 나에게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남 잘되는 것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제자들의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오늘 본문 27절부터 보면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27-30)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요한이 한 말 가운데 마지막 말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흥하여야 할 분은 그리스도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사명

요한은 먼저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권위나 사명들 그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보다 더 큰 권위와 사명을 가지시고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왔던 것 역시도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신 것인데 그것은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장차 하늘로부터 오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진 것임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자기에게 왔던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이러한 세례 요한을 대하면서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대로 행동하는 요한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한과 같은 생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목사는 더욱더 요한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교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고 나에게 보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교회도 아니고 내 교인도 아닙니다. 예수에게로 인도하라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사람을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세태를 보면 내 교인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교인 수 늘리기에 급급하고 한번 내 교인이 된 사람은 다른 곳에 빼앗기에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에서 사람들을 예수에게 인도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요한과 같은 사명을 볼 수 있습니까?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흔적이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교회가 흥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쇠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쇠하는 것으로 여기고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흥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인의 사명을 운운하고 전도의 부담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내가 흥하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요한도 그러한 기쁨으로 살았습니까? 요한은 자신의 기쁨을 신랑 친구의 기쁨에 비유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맡습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신랑의 결혼을 도와주는 것이고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함으로서 끝나게 됩니다. 이때 신랑 친구의 기쁨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즉 신랑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자신이 사람을 취하고 자신이 흥함으로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증인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해야 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린 항상 그리스도 앞에 서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섭섭한 마음을 가집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세례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을 계시해 주는 데 있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백성을 자기에게 매어두려는 중개자는 예수님의 사람을 가로채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내 교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예수님의 사람을 가로채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내 교인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다만 그리스도의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4. 흥함

그러면 마지막으로 흥하여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흥함이란 과연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흥함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회사라면 수입이 늘고 사원이 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교회라면 교인수가 많아지는 것을 흥함으로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간다고 했을 때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한 것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흥함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인 보다는 기독교인 수가 많아야 기독교가 흥하는 것으로 여기고, 내 교회의 교인 수가 많아야 교회가 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요한이 사람이 많이 몰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말을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흥함으로 이야기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외면한 그때는 철저하게 쇠하여진 예수님이었습니까?

요한은 단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의 수보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말한 흥함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자신에게 나와서도 안 되고 자신의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며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흥하여야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를 자는 자기 죄를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서 사망에서 구출되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들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신에게 보내어진 사람에게 다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일에 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기쁨은 자신의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을 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을 누렸듯이 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자입니다. 중심은 그리스도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됨으로서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내가 중심적인 자리에 존재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곧 신자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사람이 가는 것을 시기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기 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교회에서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흥함을 위해서 우리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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