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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과 진리의 예배

본문 / 4:19-26

 

1. 예배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인의 증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교인들의 신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예배를 드릴까?’에 관심을 두고 궁리를 하기도 합니다.

예배의 순서를 이리저리 바꿔보기도 하고 또 다른 교회가 하고 있는 예배를 참고하기도 하며, 뭔가 교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듯한 새로운 순서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예배가 너무 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 틀과 형식을 탈피한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흔히 말하는 열린 예배입니다.

결국 교회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배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에는 어떤 식의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예배는 예배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따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순서나 그 형식을 보고 받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든 사도신경을 하든 또는 하지 않든 주기도문을 하든 하지 않든 그러한 것이 예배의 정당성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정확히 판단해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예배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예배하지 않는 신자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배와 동일한 것인지부터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배 없는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고 말씀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배입니다. 즉 이 말은 영과 진리로 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전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이라고 되어 있고, 지금 보는 개역 개정 성경에는 영과 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나 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많이 들어본 말씀일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도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강조하는 것만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과 진리를 기존의 예배와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영과 진리를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영과 진리를 인간의 정성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에 대한 인간의 정성은 예배 시간 늦지 않기, 예배 때 조용하기, 예배 때 다른 생각이나 근심 걱정 안 하기 또는 설교 때 졸지 않기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 본문에서도 영과 진리를 그러한 의미로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 영과 진리의 예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생수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육적인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즉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여인은 그 물만 있으면 물 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생수를 원하게 됩니다. 육적인 차원에서 생수를 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꺼냄으로서 남편이 다섯이라는 여인의 본질을 끄집어냅니다. 도대체 생수와 남편 이야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일단 여인이 원하는 생수는 예수님이 주고자 한 생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으로 하여금 참된 생수를 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남편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라는 자기 본질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남편이 없다는 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다섯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드러난 자신의 본질로 인해서 놀라게 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자신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같은 사마리아인도 아닙니다. 생전 처음 보는 유대인 사람이 남편이 다섯이라는 자신의 죄된 본질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여인은 오늘 본문에 보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는 고백을 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선지자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시각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접근했을 때 단지 유대인 남자로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생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 때에도 다만 신비한 물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추어진 본질이 드러남으로 인해서 유대인으로만 보였던 예수님이 선지자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더럽고 추한 본질에 대해 철저히 인식함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의 부도덕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여인의 더럽고 추한 본질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여인은 이제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20절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라고 합니다. 여인의 질문은 한마디로 예배하는 장소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인이 갑자기 예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난 자신의 죄 때문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선지자 앞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죄 씻음 문제인 것을 여인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씻기 위한 예배를 생각하게 되고, 때문에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이산에서 예배를 드렸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과연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말하는 이 산이란 그리심 산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의 이 말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각각 세겜에서 단을 쌓았던 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12:6-8)라고 하여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창세기 33장에도 보면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기에 직역하면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 불렀더라”(33:18-20)고 하여 야곱 또한 세겜에서 단을 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겜에 바로 축복의 산이라고 하는 그리심 산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여인의 말은 사마리아에는 조상 때부터 예배하던 그리심 산이 있고 유대인인 당신들에게는 성전이 있는데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좋으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자신의 죄의 본질을 알게 된 여인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겸손함인 것입니다.

여인의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1-2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사마리아의 종교체제, 즉 그리심 산과 유대인의 종교체제, 즉 예루살렘 성전을 모두 거부하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체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체제와 상관없이 아버지께 예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심 산 없이도 아버지께 예배하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 없이도 예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장소와 지역에 의존한 예배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는 예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어떤 것인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예배라고 하면 정해진 장소에 함께 모여서 목사의 인도 아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설사 혼자 예배드린다고 해도 성경 보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는 것이 있어야 예배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서 목사가 집례하는 예배에 비하면 한 수 낮은 예배라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주일 예배가 정식 예배고, 혼자서 하는 것이나 가정에서 하는 것은 간이 예배라는 의식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생각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 씻음 받기 위해서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가정에서 나 혼자 예배 드려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할 때 예배당에서도 말고 가정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답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예배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고 오늘 우리가 이 시간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이며 하나님은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아는 것을 예배함

오늘 본문 22절을 다시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4:22)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 있어서 예배의 대상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문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고 예배한다면 그것을 참된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는데 단지 예배의 형식과 의식을 행했다고 해서 예배로 받아들여진다면 하나님은 단지 인간에게서 예배라는 의식만을 받으신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 등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물이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고 예배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를 아느냐로 시작합니다. 결국 영과 진리는 아버지를 아는 것으로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22절의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은 아버지를 모르고, 유대인은 아버지를 안다는 뜻인 것입니까?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는 잘못된 것이고, 유대인의 예배는 참된 것이라는 말씀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예배는 인정하지 않으시고 유대인의 예배는 인정하신다는 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 것이겠습니까? 과연 유대인이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8:19)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결코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아버지를 안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면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안다면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과연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2절에 말씀하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씀은 무엇이며 또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것은 참된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대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은 민족적 유대인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유대인, 즉 예수님이 가져다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한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다는 말의 우리에 해당 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우리에 해당 되는 참된 유대인이며 이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영과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가에 대한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을 아는가?’로부터 시작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제쳐두고 무턱대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 정작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의 본질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알게 되고 결국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가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문제를 끄집어내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 문제에서 예수님을 유대인이 아니라 메시아로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4:25)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26절에 보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4:26)고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자신과 대화하는 유대인이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의 본질을 보고 예수님을 보는 자는 예수가 자신을 죄에서 건질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산도 예루살렘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찾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예수님을 찾아 나오면서 감히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의 행함에 전혀 의의 의미를 두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함에 의의 의미를 둔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무시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어떤 자기 행함도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바라보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를 단지 예수님을 생각하면 다 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그 생각과 마음은 행함을 인도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으로 행함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과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신 길을 가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역시 자신을 낮은 자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고 성령 안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당이나 의식과 상관이 없다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무시하고 초월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예배당에 모이는 것은 교회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통로이거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된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리고 함께 한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성실해야 합니다. 시간도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교회로 모여서 내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고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산다면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형제들에게로 확산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있다면 이웃에게로 흘러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구하고 배우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모일 때 찬송과 감사가 노래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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