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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베데스다에서의 은혜와 율법

본문 / 5: 9-18

 

1. 유대인의 신앙

교회가 성경을 멀리 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 없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처음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오신 분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장차 말씀이 육신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미리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 없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곧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고 진리와 생명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을 가까이할 이유는 성경에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너무 당연한 말씀을 마치 초보 신자를 가르치듯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고 외치는 교회가 정작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스도에게 조차 마음이 멀어져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39절부터 보면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5:39-40)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다면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했다고 하면서 왜 예수님에게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영생 얻는 길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영생 얻는 길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 형편이었으며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생을 얻는 길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목표일 뿐, 길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길에 충실하면 나중에 예수님의 생명에 도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신앙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도달한다는 생각은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는 저주만이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9-10)고 합니다. 여기 말씀대로 하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위한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예수에게 나오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2. 율법과 은혜

지난 시간에 베데스다 못에 있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이적은 자기 행위로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베데스다 못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으로써 은혜를 뜻하는 희생 제물인 양이 들어오는 양문 곁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베데스다 못에 모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은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모인 병자들은 천사가 내려와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물을 움직이면 누구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예수님이 오시고 38년 된 병자를 골라서 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생명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얻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길, 즉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야 고침 받는다는 조건은 가지고 있지 않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다른 길을 가지고 있다면 참된 길이 주어졌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8절에 보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5:8)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자 그것을 본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5:10)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에는 안식일에 일정한 무게 이상의 물건을 들고 걷는 것을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되어 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 하반절을 보면 이 날은 안식일이니”(5:9 )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볼 때 예수님은 이미 그날이 안식일임을 의식하고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결국 유대인들에 대해서 안식일이란 율법에 대한 시비를 일으키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피할 수 있는 시빗거리를 고의적으로 만드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부딪히는 것을 드러내심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길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인들의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으심으로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죽으시려고 까지는 안 했는데 말씀을 증거하다 보니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의로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일으키시고 그 결과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를 갖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에 의해서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목격한 것은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이 아닌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받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38년의 질병이라는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이 놀라움을 목격했을 때 어떤 반응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까? 분명 그 병자를 고치신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병자가 고침받은 놀라운 사실은 보이지 않고 다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 즉 누군가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떻게 병이 나았느냐?’라든가 너를 낫게 한 분이 누구냐?’라는 물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너는 안식일에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느냐?’라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38년 된 병자가 병에서 해방된 은혜는 보지 못하고 겨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을 가지고 책망하는 그들이 참으로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를 통해서 나타난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신앙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오늘날 많은 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율법을 신자로서 지켜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예수님이 증거되고 신자의 신앙이 굳건해진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킴으로서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자체가 이미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율법이 우리의 길이 되시고 구원의 통로가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율법이 또 다른 은혜의 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할 행함의 문제로 이해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있고, 이로 인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소위 율법을 범하는 모습이 보여질 때 가차 없이 책망하는 것들이 보여지기 일쑤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율법 지키는 것을 구원을 얻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은혜와 율법이 서로 별개의 관계로 공존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면서도 걸어가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닌 율법의 길에 있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가 유대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교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소위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죄로 보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를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고 신앙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으로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다른 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신앙의 유일한 길 역시 예수님의 은혜에 두고 있다면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만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에 대해서 그가 은혜 안에 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만 본다면 그것이 곧 은혜를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은혜와 죄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5:14)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더 심한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38년 동안 질병의 고통에 시달린 비참한 상태보다 더 심한 상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38년보다 더 긴 세월 동안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38년간 앓았던 질병보다 더 고통이 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더 심한 것이란 육신의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심한 것이 생기는 것을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고침받은 38년 된 병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에 대한 죄는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베데스다 못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만을 높이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시는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야 산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베데스다 못을 기대하고 산다면 그것이 곧 죄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서 처하게 되는 38년 된 질병의 고통보다 더 심한 것은 무엇입니까?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받는 비참한 상태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로 인한 멸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원한 멸망의 고통에 처하게 된 것, 이것이 38년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그 기간이 70년이든 80년이든 상관없이 평생을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다고 해도 그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없습니다.

우리를 멸망이라는 비참에서 건지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건 지키지 못하건 상관없이, 율법을 지키든 지키지 못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은혜가 주어지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은혜가 이런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주어지는 은혜에 지나지 않으며 또 이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행위에 대한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어떤 조건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의 무엇을 보고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 병자가 은혜를 받을만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마 어쩌면 그 병자는 베데스다 못에 모인 많은 병자들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처지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보기에는 베데스다에서 고침 받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 즉 구원하고는 가장 거리가 먼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가장 비참한 사람을 골라서 낫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보이시며 또 은혜는 사람을 보고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이든 은혜든 사랑이든 그 모든 것은 율법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사랑을 받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그리스도로 주어집니다. 하늘의 복 역시 그리스도로 주어집니다. 모든 것의 통로는 그리스도이지 결코 율법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자가 신자이며 믿음이 있는 자이고 하늘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자리를 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주일이면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일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들이 함께 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 모임을 사랑해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일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이미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초등학교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오늘 본문 15절부터 보면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5-18)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예수님을 더욱 죽이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얼마든지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핍박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철저한 경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정확하게 발음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면서 하나님과 동등 되게 말하는 예수에 대해서 조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정작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말씀이신 예수가 필요 없고 오히려 죽여야 할 대상이 돼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집니다. 교회가 표어로서 많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충성하고 주일 잘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과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중심 한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중심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중심 역시 마찬가집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성경 중심으로 사는 것이고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의를 얻고 죄에서 건짐받은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무엇을 지킨다, 지키지 않는다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둘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에게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가르치면 됩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은혜를 아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가?’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많이 하는 자는 은혜를 아는 자이며 하지 않는 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성장에 초조해지면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만 말하다가는 교회가 안된다는 조급함에 은혜를 빙자해서 행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하는 자가 곧 믿음이 있고 은혜를 아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은혜를 말하면서 베데스다 못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면 은혜만 의지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율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임을 우리의 마음에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못에서 배울 수 있는 은혜와 율법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은혜와 별도로 신자의 행함의 기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행함은 은혜로 인해서 증거되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그가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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