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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말과 거짓말

본문 / 삼하17:15-20

 

1. 거짓말

사람들에게 있어 거짓말이라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 중에 선의의 거짓말이 있음을 말하면서 선의의 거짓말은 무조건 나쁘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거짓말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일단 보류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 채 오늘 말씀을 듣게 되면 결국 오늘 나누는 말씀은 그냥 하나의 괴변으로 들릴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앞의 내용부터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앞 1절부터 보면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삼하17:1-4)고 합니다.

아버지 다윗에 대한 반역으로 아버지 다윗과 전쟁 중인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군사적 계획을 듣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기습하여 지금 당장 다윗을 쳐서 죽이겠다는 계략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말에 수긍을 하며 옳게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이런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은지를 후새에게 묻게 됩니다. 후새는 거짓으로 투항한 사람입니다.

5절부터 보면 “5.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삼하17:5-7)라고 합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략은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 후, 많은 군사를 모아 압살롬이 직접 다윗을 치라는 계략을 새롭게 제시하게 됩니다. 아마 후새는 압살롬이 많은 군사를 모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다윗이 도망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이런 계략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되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 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삼하17:15-16)고 합니다.

후새는 사람을 다윗에게 보내어 성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그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삼하17:17)하는 내용을 보면 당시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전달 책임을 맡은 사람은 사독과 아비아들의 아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직접 후새를 만나 전달 내용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이 볼 것을 두려워하여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숨어 있었으며 계집종 하나가 이들에게 후새의 말을 전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18절에 보면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삼하17:18 )고 하여 그만 한 소년에게 발각이 된 것입니다.

이 소년은 압살롬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고하게 되고 두 사람은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에 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여인은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어서 위장을 합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고 하게 되고 결국 압살롬의 종들은 그 두 사람을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분명 이 여인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과연 거짓말이라는 죄를 범한 것으로 규정지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여인의 말이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사람을 살리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로서 죄를 범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통속적인 말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2장에도 보면 비슷한 내용으로 라합이 여리고 왕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합도 분명히 거짓말을 하였으나 성경이 라합이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5)고 하여 라합을 의로운 자로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라합의 거짓말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 의롭다고 여기는 것일까요? 거짓말이 죄라면 아무리 선의가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죄일 뿐입니다. 즉 선의라는 것으로 죄가 선으로 바뀔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면 거짓말이고, 참말이면 참말이지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창세기 20장에도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책망하기는커녕 아브라함의 말을 믿고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한 아비멜렉을 책망하십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하는, 어찌 보면 변변치 못한 남편의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라는 책망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럼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참말과 거짓말의 기준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거짓말에 대한 바른 의미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선의의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오직 참말과 거짓말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분명 악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윤리를 기준하여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악함과 선함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 악함과 선함을 분별하는 것이지 세상이 알고 있는 윤리가 기준이 되어 악과 선이 분별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적인 나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악인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의인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윤리를 선하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선하다고 여기는 윤리는 결국 인간의 윤리적 행동, 즉 선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왜 지옥가야 하느냐?’는 항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선한 의도로 했다는 것으로서 거짓말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에 그 여인이 도망친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두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냐? 라는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윤리와 도덕으로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갈 수 있는 것이지 윤리와 도덕으로는 절대로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윤리와 도덕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윤리적으로 산다 해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윤리에 붙들려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외쳐지는 말들이 세상의 윤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쳐야 하는 기독교가 윤리 종교로 전락돼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여인의 거짓말은 윤리를 떠나서 생각해야 합니다. 윤리를 떠나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인이 두 사람을 숨겨 준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압살롬이 강자고 다윗은 약자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압살롬에게로 사람들이 몰렸을 것입니다. 누구든 다윗 편에 선다면 그것은 자신의 앞일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길을 가는 어리석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다윗의 정탐꾼을 도움으로써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약자의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도외시한 채 약자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분명 어리석은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이란 자신의 이득과 유리함을 위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의 배후에는 그 거짓말로 힘을 얻고 또 힘 있는 자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현실과 다른 말을 한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인간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아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힘 아래 있는 것이 세상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만이 힘이 되는 것이지 세상이 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힘으로 보는 그것이 곧 현실과 다른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약자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약자의 길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을 세상에서 강자가 되는 길로 말한다면 그것은 참말이겠습니까? 아니면 거짓말이겠습니까?

성경은 거짓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고 하여 여기 거짓말하는 자는 둘째 사망에 해를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차원의 거짓말이라면 누가 감히 둘째 사망의 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어느 누가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21장에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1:27)고 하여 거짓말한 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2장도 보면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22:15)고 하여 여기도 거룩한 성 예루살렘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는데 여기에도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만 보아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짓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거짓말은 아님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거짓말에 대해 요한복음 8장에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고 합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 즉 거짓의 근원이며 또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고 오직 거짓만이 있을 뿐이기에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마귀는 참말을 하지 못합니다. 오직 뱉어내는 말은 거짓만 말할 뿐인 것입니다.

그가 한 최초의 거짓말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를 유혹하며 하는 말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마귀는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리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그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마귀의 말처럼 죽지 아니하고 도리어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3:22)라고 하여 마귀의 말이 참말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마귀는 참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는 진리가 없고 오직 거짓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선악과 사건에서 마귀가 한 말은 왜 거짓이 되는 것입니까? 마귀는 모든 이야기의 기준을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을 근거로만 합니다. 이 땅에 속한 것은 하늘에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처럼 심판으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하늘의 기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말미암은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오직 땅의 생명인 인간의 목숨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고 인간의 목숨은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불순종하여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망의 상태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런 영적인 하늘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땅의 것으로만 유혹할 뿐입니다.

그런 유혹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는 고백 후에 비로소 하늘의 이야기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고 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고 합니다. 사탄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 사람의 일이란, 자신의 성공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주를 따르며 누가 크냐의 문제로 항상 싸웠습니다. 그러니 그런 주님이 죽으시면 안 되고 살아서 로마를 무너뜨려야 자신들이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결국 땅의 일의 성공, 자신의 계획 성공만을 생각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거짓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거짓은 그 기준이 언제나 항상 하늘의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중심으로 말하며 땅의 것을 중심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보실 때는 거짓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거짓말로 규정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에 위배된 것, 그것이야말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기준할 때 여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선 것, 즉 세상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힘 있는 자 덕분에 힘 있는 자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하늘에 속한 마음으로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인의 말은 오히려 참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참과 거짓은, 사실과 같은 말을 하느냐 다른 말을 하느냐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편에 있느냐 세상 편에 있느냐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3. 윤리와 진리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회가 진리를 말한다고 하나 실상은 거짓말에 열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몇 곳만 찾아 살펴보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1)라고 합니다.

세상은 하늘 소망을 가진 자들을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땅의 것을 가지고 유혹하며 박해합니다. 렇게 땅의 것이 우리에게 유혹이 되고 박해가 되면 그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소망하며 사는 일에 유혹이 되고 방해가 되는 것 자체가 내가 하늘에 속한 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 마태복음 7장에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땅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성공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길을 좋아합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은 양을 살리는 자들이 아닌 양을 죽이는 이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도 보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24:11)라고 하여 말세에 나타날 증상 중에 하나로도 거짓 선지자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만나는 신앙의 현실인 것입니다.

말세에는 땅의 것을 마치 복이며, 땅의 성공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이라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늘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한 적도 없고 또 약속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고 세상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리에 위배된 거짓말인 것이며 그 거짓말을 하는 자와 따르는 자의 결론은 앞에서 읽은 계시록에 너무나 잘 약속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윤리를 붙들고자 하는 것은, 윤리가 무너지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윤리 역시 악한 것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는 것입니다. 윤리가 무너지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교회를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에 윤리가 무너지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겠습니까? 오히려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는 세상의 윤리는 무너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윤리가 중심이 된 교회에서 나올 것은 어린 사람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식의 도덕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윤리가 말하는 어른 공경은 어른이라는 것을 힘으로 삼고 있는 말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으니 적게 산 너희들은 내 아래 있다는 생각에서 공경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역시, 많이 가진 힘 있는 자가 적게 가진 힘없는 자를 도와주는 차원일 뿐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그러면 윤리가 아닌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이겠습니까? 윤리가 없으니 어린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보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에는 어른은 있으되 어른을 힘으로 여기는 어른은 없습니다. 진리 앞에 죄인만 존재할 뿐 어른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사람들이 어른을 무시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섬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연로하심으로 힘없는 어른들을 돕는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는 윤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것은 오직 진리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삶만이 참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착하고 양심 바르게 살았으니 복 받고 천국가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야말로 거짓에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을 착한 자로 만들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보며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여인의 말이 사실과는 다른 말이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현실을 비춰 볼 때 힘 있는 자를 따르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선 것이야 말로 현실에 맞는 참된 말이 된다는 이 이치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진리에 서 있는 자라면 힘 있어 보이는 세상과 땅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힘없어 보이는 하늘과 진리에 속한 자로 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라는 그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윤리에 붙들려서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윤리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진리 안에서 진리의 자유 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 안에서 참말을 하며 날마다 힘없이 죽으신 예수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세상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든 기준은 세상의 윤리를 기준으로 보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편리함을 따라 우리 합리화를 위한 기준도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속한 우리의 기준은 진리이신 주의 말씀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예수는 믿되 삶은 언제나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게 될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2024년 한해도 언제나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기준과 이야기를 누리며 사는 2024년 새해의 우리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짓말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이라 합니까?

 

3.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성경에서의 선과 악의 기준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인간이 추구하는 윤리와 도덕으로는 천국을 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거짓말은 무엇이라 하며 그 거짓말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6. 세상 현실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거짓말은 무엇이고 참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예수님과 믿음의 길을 이야기 하면서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8. 선악과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마귀의 거짓말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무엇입니까?

 

9.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고백 후에 나타난 사람의 일과 거짓말은 무엇입니까?

 

10. 하나님이 거짓과 참으로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도가 말세에 듣게 되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2. 세상 윤리만 있는 교회와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에서 드러나는 다른 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3.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자는 어떤 자라고 하십니까?

 

14. 오늘 본문이 여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 2월 4일 / 요한계시록 46. (계14:1-5) 어린 양과 짐승의 이름

    Date2024.02.04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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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월 28일 / 요한계시록 45. (계11:11-18) 짐승의 수 666

    Date2024.01.28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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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월 21일 / 요한복음 29. (요 6:1-2)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Date2024.01.21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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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월 21일 / 요한계시록 44. (계 13:1-10) 세상 속의 신자

    Date2024.01.21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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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월 14일 / 요한복음 28. (요 5:39-47) 성경과 그리스도

    Date2024.01.14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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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1월 14일 / 요한계시록 43. (계 12:7-17) 땅의 전쟁

    Date2024.01.14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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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월 7일 / 요한복음 27. (요5:30-38) 증거자의 참된 증거

    Date2024.01.07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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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월 7일 / 신년감사예배 / (삼하17:15-20 ) 참말과 거짓말

    Date2024.01.07 Category2024 By관리자 View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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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2월 31일 / 요한계시록 42. (계12:1-6) 아이와 여자와 용

    Date2023.12.31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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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2월 24일 / 요한복음 26. (요 5:19-29)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Date2023.12.24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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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2월 24일 / 성탄감사예배 / (마 2:1-12) 베들레헴에 오신 왕

    Date2023.12.24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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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1월 17일 / 요한복음 24. (요 5:9-18) 베데스다에서의 은혜와 율

    Date2023.12.17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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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1월 17일 / 요한계시록 41. (계 11:15-19) 신자에게 확실한 것

    Date2023.12.17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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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2얼 10일 / 요한복음 24. (요 5: 1-9) 베데스다 전설과 신앙

    Date2023.12.10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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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2월 10일 / 요한계시록 40. (계 11:7-13) 두 증인의 승리

    Date2023.12.10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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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2월 3일 / 요한복음 23. (요 4:43-54)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자들

    Date2023.12.03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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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2월 3일 / 요한계시록 39. (계 11:3-6) 두 증인의 권

    Date2023.12.03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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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1월 26일 / 요한계시록 38. (계 11:1-2)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Date2023.11.26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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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11월 19일 / 추수감사주일 / (출 23:14-17) 이스라엘의 3대 절기

    Date2023.11.19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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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11월 12일 / 요한복음 22. (요 4:39-42) 우리가 친히 듣고 앎이라

    Date2023.11.12 Category2023 By관리자 View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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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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