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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증거자의 참된 증거

본문 / 5:30-38

 

1. 전하는 자와 듣는 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다 옳고 참된 것으로 인정할 생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는 아마도 라고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 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조건 참된 것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자기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관계가 얽히게 됩니다. 먼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만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할 때는 그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의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의 말이 자신의 사고에 맞는 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의 자신의 사고와 상식에 맞는 말일 때 그 말을 참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결국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여 전하는 사람은 목사입니다. 즉 하나님은 목사를 세워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들에게 크게 작용하는 것이 목사에 대한 신뢰인 것입니다. 즉 목사를 신뢰할 때 그가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학력과 인품 그리고 자기 신뢰 등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목사가 전한 가르침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라는 판단이 없이 참된 말로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목사를 신뢰하기에 그 말 역시 신뢰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싫어하고 반대하는 목사가 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싫기에 그가 전하는 말도 싫어지는 것입니다. 저 목사라면 틀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저 목사는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저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다 믿을 수 있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누군가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져 보신 적이 없습니까? 있다면 이것은 속히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성도는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말씀을 듣는 성도는 목사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다만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목사와의 관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목사가 싫으니까 그 말 역시 듣기가 싫어지고, 목사가 좋으니까 그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내가 신뢰하는 사람의 말이기에 참된 것으로 신뢰가 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군가의 말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대한다면 혹시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의 내용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반대해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인간적 관계와 우리가 이미 자기만의 선입관과 답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참된 말씀이 증거된다고 해도 그 말씀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리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이 바로 이런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회가 되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일찌감치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였다는 이유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해도 과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증언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5:31)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참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돼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에 대해서는 전혀 증거할 수 없다는 뜻이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해석이 참된 것이라면 요한복음 8장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8:14)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오늘 본문의 31절과 요한복음 814절이 서로 반대됩니다. 31절에서는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814절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는 참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구절의 서로 다른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건 유대인을 향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한다고 해도 그 말씀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은 요한복음 8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보면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8:12-13)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자신이 곧 세상의 빛이라고 증거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당장 네가 너를 위해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않다고 반박을 한 것입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의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반대하기에 그 말씀까지 반대하는 반응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지도 않은 한 청년이 감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 적절한 처벌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은 자신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원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일을 본다면 곧 하나님의 일을 본 것이고 아들을 공경한다면 그것은 곧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0절의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뜻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심판 역시 의롭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존재와 뜻에 있어서 하나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종속되어서 꼼짝없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아들의 사역과 뜻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이란 아버지를 안다면 아들을 알 수 있고 아들을 안다면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1절의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 증거는 참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면 오늘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잘 믿어주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면서 예수님을 잘 믿어주면 그것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라면 그 뜻과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완전한 일치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의 관계에 있다는 것 역시 일과 뜻에 있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 예수님이기에 아버지의 뜻과 일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예수님이라면 그분이 자신을 위해서 증거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일치된 뜻 안에서 증거되어지는 예수님의 증거는 참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8장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8:14)는 말씀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참된 증거를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기에 나아가서 그 말씀까지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관계에 있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관계에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되 철저하게 자기 생각과 뜻을 가지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세상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진심으로 아는 신자라면 결코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사상을 증거하기 위해서 애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인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에게 신자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목사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의도적인 표정과 행동을 만들어 낸다면 그는 결국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자신의 지식을 포기하지 않는 주장이라면 그의 증거는 참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참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3. 보냄받은 이의 일

오늘 본문 33절부터 보면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8:33-36)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왜 세례 요한의 증거를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요한이 예수님에게 증거한 것은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증거가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셨기 때문에 요한의 증거를 말씀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요한의 증거를 앞세우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증거는 단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증거, 즉 요한의 말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이루시는 역사, 예수님이 하시는 그 역사가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루시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 하나하나가 개인적인 공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셔서 이루게 하시는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완성이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요한의 말보다는 아버지가 이루시는 역사 안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행함이 더욱 큰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그 본래의 의도대로만 볼 수 있었다면 그 표적들에서 아들을 증거하시는 아버지의 의도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보지를 못합니다. 단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신앙 사상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 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을 향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5:37-38)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속에는 말씀이 거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내신 분을 믿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듣는다고 하고 본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때부터 이미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그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신자라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볼 것이고, 그리스도의 행하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앞에서 우리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속에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지식을 쌓는데 열중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증거라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참된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세상에서 옳은 것으로 인정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할 뿐입니다. 남들이 믿어주든 믿어주지 않든 그것은 증거하는 자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속이 터진다면 그것은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분함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속 시원한 것은 보란 듯이 하늘에서 천군 천사를 불러서 유대인들을 혼내주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봐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 맞지라고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눌러 버리는 것이 가장 속 시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분풀이를 함으로서 그들을 후회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본성에 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약 자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 증거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7:18)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들, 즉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셔서 살리신 자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산 자가 된 신자는 예수님에게로부터 보냄 받은 자입니다. 보냄받은 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에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예수님과 일치된 뜻 안에서 역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산 자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라면 보냄받은 자의 삶은 결코 자신을 증거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 개인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계실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으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나의 감정 역시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속 터질 정도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뜻과 생각 감정보다 말씀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보냄받은 자의 자세임을 잊지 말고 이 일에 부지런히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안다면,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가는 신자라면 나보다는 그리스도를 앞세운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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