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땅의 전쟁
본문 / 계12: 7-17
1. 진행 중인 전쟁
우리가 보는 구약성경은 ‘전쟁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전쟁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였으며, 이스라엘로 인해서 죽은 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이야기 안에서 과연 우리는 ‘평화’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쟁이 없는 신약에서만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의 하나님 역시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얼룩진 이런 구약의 역사에서 과연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고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방인과 싸우신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에게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리어 이방인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치시고 죽이신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자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 가운데는 구약에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찾기가 힘들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약의 전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전쟁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을 치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시는 것을 취미 정도로 여기시는 분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원주민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멸절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명령에서 우리는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내가 존재하는 나라가 멸절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만약 멸절시키라는 대상이 바로 내 나라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항변을 하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전쟁사에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과연 누구와 싸우시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겉으로는 가나안 원주민과 싸우십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치시는 것을 본다면 굳이 이방인만이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상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합니다.
또 구약에는 전쟁의 이야기가 많지만 신약에 와서는 전쟁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들어서 이방인을 멸절하는 내용도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전쟁은 그친 것입니까? 과연 전쟁 이야기는 구약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전쟁이 끝났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시는 원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적이 없어야 전쟁이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누가 여호와의 원수입니까? 또 신약에는 여호와의 원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내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구약의 전쟁 개념을 바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구약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신약에서도 역시 여호와의 전쟁은 계속됩니다. 또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고 이 전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전쟁입니다. 전쟁이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신자된 자가 여호와의 원수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지 부처상이라든지 또는 단군 신상 아니면 이슬람 사람이나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원수라고 이해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과연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전쟁이 이런 전쟁이었습니까? 그렇다면 불교가 없고, 단군 신상이 없고, 이슬람도 없고, 무당이 없고 점치는 사람만 없으면 전쟁은 그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시대는 결코 전쟁이 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남보다 출세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사는 것만이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탐욕의 투쟁일 뿐입니다. 그 탐욕의 투쟁에 인간들이 서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이익과 장래를 위해서 하나님이 좋은척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마치 국회의원 출마자들이 당선을 위해서 국민을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을, 유권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이나 신자가 하나님을 자기편 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에서 여호와의 전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구약에 있었던 여호와의 전쟁은 과연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적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전쟁의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있기 훨씬 전에 이미 하늘에서 모종의 전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계12:7-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싸움처럼 신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는 이런 이야기를 과연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믿거나 말거나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믿는 자가 누구냐?’라고 묻는 것이며 또 그런 자를 찾는 것입니다.
하늘의 전쟁 이야기는 미가엘이란 천사와 그의 사자들이 용과 그의 사자들과 싸운 이야기입니다. 미가엘은 유다서 1장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1:9)고 하여 ‘천사장’으로 말합니다. 즉 천사들의 우두머리가 용과 대적하고 그 군사들이 서로 대적한 것이 하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용은 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된 용은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9절의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12:9)는 말씀대로 이제 용의 활동 무대는 땅이 된 것입니다.
용의 정체는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기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합니다. 옛 뱀이란 무엇을 말합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하와를 꾀었던 뱀을 말합니다. 마귀가 하와를 꼬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지음 받은 세상을 훼방함으로서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와를 꼬여서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는 인간을 자신의 다스림 아래 끌어들임으로써 하나님보다 권세 있음을 과시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 좋은 것이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포기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곧 사단의 권세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 그 누가 사단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를 합니다. 이것이 지난 시단에 말씀을 드렸던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제 인간의 후손은 가망성이 없는 것입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후손은 날 때부터 사단의 권세 아래 납니다. 이러한 인간이 사단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편을 자기 스스로 물리치고 대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싸우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적으로 여겨져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단은 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인간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여기고 원수로 대적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존의 인간에서 가장 나아 보이는 자를 선택해서 사단과 싸우는 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보내심으로서 사단과 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여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인 용은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삼키려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을 하면 자신의 패배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에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12:5)고 하여 그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늘로 올려갑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아들을 삼키는 일에 실패한 용은 싸움의 대상을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삼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12:17)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는데 이들이 곧 사단의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는 분명 전쟁이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지 않은 자들은 알지 못하는 싸움입니다. 사단은 그들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런 전쟁을 하며 살아가는 삶입니까? 만약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단과의 싸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나 자신이 과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셔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단과의 싸움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대적자가 누구이며 원수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싸움이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지만,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된 세상이 어떤 것인가가 확실하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기 전에 먼저 ‘나는 과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로 살아가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예수의 증거’가 있습니까? 예수의 증거가 있는 자가 곧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천국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의 증거란 무엇입니까? 예수의 증거란 단지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사셨던 삶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따라가신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좇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좇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전쟁은 바로 이런 의미의 전쟁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인간이 볼 수 있는 전쟁으로 우리 가운데 펼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사고방식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좇아가는 사고 방식과의 싸움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은 ‘너희가 원하는 것을 좇아가지 말고 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의 명령을 지키고 순종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추종하는 세력을 만드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도구 삼아서 사단의 사고방식과 대적하게 하시겠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도 사단의 사고방식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하신 것입니다.
3. 우리의 전쟁
이것을 신약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고 말합니다. 옛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사단의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새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세상에 새롭게 남겨진 자이며, 그런 자는 바로 자신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가 바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이며 이는 옛사람과 싸우는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승리는 어떤 것입니까? 전쟁이 있으면 분명 승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과연 승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승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승리라고 기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분명 승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승리’를 말하기가 아주 난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말하고 기대하는 승리라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우뚝 서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되고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고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승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리가 과연 그러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과연 인간의 시각에서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죽었지만 다시 부활해서 승천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즉 힘없는 자처럼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절대로 패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의 승리라고 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왜 예수님과 같은 그러한 승리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비록 힘없는 자로서 온갖 천대와 무시를 다 받으시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분명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부활과 승천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모든 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약속 안에 사는 신자라면 이미 승리 안에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힘없는 자로 산다 해도 그것을 패배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의 양과 질을 따져 가면서 누가 더 높이 있고,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 가면서 승리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 자체가 곧 패배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세상의 사고방식이며 사단의 사고방식 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말씀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누구나 다 자신의 목숨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말씀을 따라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단은 이미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셨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목숨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 대한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바로 이러한 승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밑의 군병들은 ‘하나님이거든 내려와 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소리인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들도 예수님이 하늘의 천사를 불러서 자신을 심판하는 자들을 처벌하시면서 당당하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세상은 여전히 힘이 있어야만 승리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사단이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힘이 있지만 그 힘으로 승리자의 위치에 서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의 길을 가심으로써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라고 말합니다. 신자란 사단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신자는 사단이 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신자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를 고발할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사단은 성도를 고발하고 괴롭힐 이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0절에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미 구원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백성된 자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는 자가 곧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의 힘없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가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이 승리의 증거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승리하심과 그의 권세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신자란 승리해야 할 자가 아니라 승리를 보여주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여주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리고 승리란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말씀만을 사랑하고 살아감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실패해도 괜찮고, 돈 없어도 괜찮고, 세상이 원하는 출세와 성공을 못한다고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기억하고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인지를 잊지 마십시오. 증인은 예수님의 증거를 나타내라고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목숨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구약의 전쟁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신자인 우리는 무엇을 적이라 여기고 또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합니까?
3. 오늘 본문의 배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용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5.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세상은 어떤 상태가 되었으며 그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예고하셨다고 합니까?
6. 세상의 속한 인간이 용(사탄)과 싸울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지금도 세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쟁은 어떤 전쟁이라고 합니까?
8. 오늘날 우리가 사탄과의 전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9. 오늘날 신자가 가진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0.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전쟁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구약의 전쟁은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또 그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12.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무엇이며 또 우리가 가야 할 승리의 길은 무엇입니까?
13.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어떠하다고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