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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경과 그리스도

본문 / 5:39-47

 

1. 성경 읽기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 하느냐 읽지 말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여김받을 것입니다. 아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 공격받을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필수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신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많이 읽을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한다면 그는 분명 믿음이 없거나 열심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라면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는 교회의 분위기에 오늘 우리는 함께 돌아보며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먼저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이것은 신자가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거나 또는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 없다거나, 성경을 많이 읽지 말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자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너무나 굳은 상식에 의해서 단지 성경을 읽는 것에 중점을 둠으로 인해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해 정작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기에 이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신자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까? 아니면 적게 읽어도 괜찮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내리려면 먼저 많이 읽는 것과 적게 읽는 것의 기준이 분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루에 몇 장 이상을 보는 것부터 많이 읽는 것이고 또 몇 장 이하는 적게 읽는 것이다라는 기준이 있어야 많이 읽는다 적게 읽는다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경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가르침도 성경은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신자가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무조건 성경을 많이 읽을 것을 강조하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는 것에 대해 매이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적게 읽어도 괜찮다는 말로 받아들이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지금 성경을 많이 읽어야 되는가 아니면 적게 읽어도 되는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성경을 많이 읽고 있다거나 또는 성경을 적게 읽고 있다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읽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영광을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진심으로 성경을 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읽는다는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이 읽는다, 적게 읽는다는 생각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질문을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신앙이 있는 사람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없다고 해도 성경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다거나 하루에 얼마를 읽는다는 것 등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신자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성경 연구 이유

오늘 본문 39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성경을 연구하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죄를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있었음을 예수님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해서 시비를 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으로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 되게 여겼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곧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로 오신 메시아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알 수 없겠습니까? 분명 이치대로 한다면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고 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입니까? 읽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는 모세의 말이 있었으며 또 그 말을 믿는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말, 즉 모세오경을 믿었으며 부지런히 읽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모세의 말은 분명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이 신약성경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이란 분명 모세의 말을 의미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46절의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는 말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말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모세를 믿지 않아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은 분명 모세를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결국 유대인 스스로는 모세를 믿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세를 믿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믿지 않았던 것, 이것이 유대인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모세의 글을 읽었다고 하지만 결국 읽지 않은 것, 이것이 유대인들의 실상입니다. 모세의 글이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믿게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면 모세의 글을 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실상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의 실상에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과 실상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성경을 많이 보고 적게 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도 읽지 않은 것과 같은 유대인들의 실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 스스로는 성경을 읽었다는 것 하나만을 붙들고 자신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한 것이라면 성경이 증거하는 영생의 길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반대로 영생의 길이신 예수님을 반대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혹시 그들이 신약성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세조차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세는 예수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세가 자신에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 정도 되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또 갈수록 성경이 참으로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이 모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모세의 의도, 예수님의 의도를 보면 되는데 항상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한 유대인들이 왜 영생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믿을 가능성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9)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참된 유대인의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로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1절부터 보면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5:41-42)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서 칭찬하고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기 위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아셨기에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를 하고,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를 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했으면서도 결국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것으로 머물러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어떤 방법을 스스로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세의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지킴으로서 영생을 얻을 것으로 알았기에 부지런히 모세의 말을 지키는 것이고 결국 지킨다는 것으로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자기 영광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 중의 하나가 축복받는 비결’, ‘기도 응답받는 비결, 또는 구원받는 비결등등 여러 비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비결이라은 결국 방법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비결과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 응답 받는 비결을 찾는다면 과연 어떤 방법이 나오겠습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분명 기도 응답받는 비결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말이지만 어쨌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어떤 방법을 취하고 이루어서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되어진다는 비결, 방법론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몰라서 안 했지 알기만 하면 할 수 있고 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자체가 반성경적이고 비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비결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방법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말씀을 드려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볼 때 자기만큼은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 같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나온다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속에 있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것들 즉 기도하는 것이나 성경 보는 것이나 헌금하는 것 등에 부지런하면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에게 부인을 당했다면 결국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로는 예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인정 받을 수 없는 행위를 들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에게 나온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생각했다면 그들이 할 것은 영생 얻는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잘 이룰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기의 행함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고 생명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자신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법을 찾지 않습니다. 방법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기적들에게 매료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신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를 먹었고,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나아갈 바를 인도받았던 그들이 부럽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안 계신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시대보다는 뭔가 눈앞에서 당장 확인되어지는 시대가 신앙에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우리가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기적들을 수없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놀라운 기적을 한 번만 체험해도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이 여겨지지만 기적을 한 번도 아니고 수없이 체험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한 자로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구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다고 해도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적을 체험한 자기 영광을 구할 뿐입니다. 인간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었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죄악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은 아무런 가능성도 희망도 없습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3. 참된 성경 읽기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누구신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러한 사건들 하나하나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처럼 희망 없는 인간에게 빛으로 유일한 희망으로 오셨음을 성경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면, 그 내면에는 인간에 대해서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인간의 실체를 모르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고 또 예수님을 모르고는 인간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곧 어둠입니다. 빛이 왔으되 빛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말씀합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어둠의 상태이며, 빛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모른다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결국 어둠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살아가는 사고방식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슨 비결이니 방법을 찾아 헤매는 모든 것이 다 어둠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성경을 보십니까? 혹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닐 것 같아서 성경을 봄으로 나는 신자다라는 자기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읽는 성경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왜 예수님만이 나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는지, 왜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가를 깨닫는 것이 제대로 성경을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하루에 몇 장을 봤는가 몇 번을 읽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을 100번을 읽으면 뭐합니까? 100번을 읽은 자기 자신이나 자랑하고 한 번도 읽지 못한 자는 무시한다면 그는 빛을 깨닫지 못한 어둠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예수님, 성경을 보니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자기들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들이 찾아낸 방법을 통해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생명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실 수밖에 없었음을 믿는 것만이 참된 믿음이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 의지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린 다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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