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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상속의 신자

본문 / 13: 1-10

 

1. 신자의 현실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떤 현실에 있는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현실에 있는지를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소경이 코끼리 다리만 만져 보고서 코끼리를 그리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현실은 어떤 것입니까?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세상 현실에 대해서 묻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인 것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은 눈으로만 보고 또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본다는 말도 하기도 하지만,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그냥 느낌일 뿐 현실은 아닙니다. 마음이 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에 우리들의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실재가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것만으로 세상의 현실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실재가 존재하고 그 실재가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 실재의 존재와 목적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눈에 보여지는 세상에 대해서 이해가 되어지고 세상 속에 존재하는 신자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실재 배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실재 배경을 무시한 채 신앙을 말한다면 그 신앙은 단지 인간들의 종교로 그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 다른 것이 없다면 별문제가 아니겠지만, 만약 신앙이 세상의 배후에 있는 다른 실재와 싸우는 것이라면 분명 보이는 세상만 현실로 여기고 살아가는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참된 의미와는 상관없는 신앙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참된 실체는 무엇이고,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그 다른 실재는 어떤 것입니까? 이것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땅으로 쫓겨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바로 용으로 등장하는 사단입니다. 계시록 129절에 보면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12:9)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땅으로 쫓긴 용, 즉 사단은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천하를 꾀는 자가 땅으로 쫓겼다면 그가 땅에서 할 일은 뻔합니다. 온 세상을 꾀는 자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배후에는 천하를 꾀는 사단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배후에 사단이 있음을 전제하고 신앙을 생각한다면, 신앙이란 단지 한가하게 교회나 출입하고 시간이 나면 교회 봉사하고, 돈에 여유가 있으면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사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인간들끼리 모여서 자기 하고 싶은 종교 생활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신앙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전혀 다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단지 신앙으로 위장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계시록 1217절에 보면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12:17)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사단의 분노가 있는데 사단의 분노는 자기가 원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단이 무엇을 원했습니까?

그것은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삼키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사단을 상하게 할 자로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15절의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안 사단은 자신이 상하게 될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여자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여자의 후손을 하늘로 올려 갑니다. 그래서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을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재이며 현실입니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증인과 사단과의 싸움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이 싸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을 과연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삶을 과연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싸움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사단이 의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현실을 아는 신자라면 어떤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세상의 현실을 아는 신자에게는 무엇이 진짜 현실이겠습니까? 어려움을 당한 일이 현실이겠습니까? 아니면 고생을 하는 것이 현실이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진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고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사단이란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문제가 현실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에게는 현실은 다릅니다. 사단과의 싸움이 현실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현실로 보기보다는 그 어려움에서 사단과의 싸움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구조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배후에 있는 세상의 현실은 어떤 것입니까?

 

2. 큰 권세를 가진 짐승

오늘 본문에 보면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13:1-2)고 말합니다.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다니엘 7장에서도 바다에서 짐승이 출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것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더라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7.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7:2-7)고 합니다.

이 다니엘서이 등장하는 짐승은 네 짐승인데,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곰 같고, 셋째 짐승은 표범 같고, 넷째 짐승은 강하고 무서운데 열 뿔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의 이 짐승은 세상 권력자를 상징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짐승은 다니엘의 네 짐승을 모두 합성해 놓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즉 아주 강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13:4)고 말합니다. 강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짐승을 경배하는 이것이 바로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는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이 왜 짐승을 경배합니까?

그것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줬기 때문인데, 그 권세가 바로 능력이고 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용으로부터 권세 받은 짐승을 경배한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을 원하고 능력을 원합니다. 능력이 있고 힘 있는 존재로 산다는 것, 즉 강자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13:3)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두고 많은 주석을 보면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이 어떤 사건을 의미한 것이냐에 관심을 두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냐가 아니라 '세상이 짐승을 따르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입니다.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았다는 것은 신비한 힘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상이 믿고 따르고 의지하고 경배하는 것은 힘이고 능력이며 신비한 기적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을 보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신비한 힘을 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평범한 것, 힘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날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을 더 대단하게 여기고 그 사람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나았으니 분명 그 사람에게 무슨 신비한 힘이 있을 것이고, 저 사람이 기도해 준다면 그 능력이 나에게도 부여될 것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에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저 평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단한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한 것, 이것을 더 크게 여겨주는 것이 세상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사단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비한 힘을 더 큰 믿음으로 여긴다면, 그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베풀었던 예수님을 생각하지 십자가 지고 힘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단지 나를 천국으로 보내주기 위한 효능으로만 여길 뿐이고, 세상에서는 병 고치는 예수님을 더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짐승이 강하고 신비한 힘을 가진 자로 등장을 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 힘에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강자로 산다는 것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강자가 존경받고 강자가 큰소리치고 강자가 대우받는 세상에서 강자로 산다는 것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능히 느끼고 살아가시는 것일 것입니다.

교회 부흥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할지언정 우리 속에서 큰 교회에 대한 매력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가 남들 보기에도 좋은 것이고 또 모든 것에 넉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큰 교회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은 우리가 큰 교회 되는 것을 목적으로 모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목사가 '큰 교회 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니다'는 말을 했다면 그것은 그 목사가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그 목사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그런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힘이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힘이 없는 것보다는 힘이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봐야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상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강자이고 권력자입니다. 신비한 힘을 가졌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르는 것이 더 유익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짐승입니다. 힘 있는 자를 따르고 의지하는 것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로 여겨버립니다. 돈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믿는다고 해서 잘된 것이 뭐냐며 조롱을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13:5)고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짐승의 머리에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고 합니다. 신성 모독하는 이름이란 우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경배한다는 의미로서 신성 모독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내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원하는 세상에서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믿음에 대해서 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별 수 없다'는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짐승이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았다고 하고 또 6절에서는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13:6)고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경배받아야 할 것을 자신이 경배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보다는 힘 있고 능력 있는 영웅을 경배합니다. 세상을 잘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자, 그가 세상이 경배할 자이지 실제 활동하는지 안 하는지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것에 반역을 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그 반역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도록 만듭니다.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같이 된다'는 이 말은 사단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만 받으셔야 할 경배를 인간이 가로채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인간으로 하여금 섬김을 받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은 '나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반역한 적도 없고, 하나님을 모독하지도 않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받고자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자신의 봉사와 헌신이 칭찬받기를 기대할 때 그것이 이미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경배를 내가 가로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일을 해서 칭찬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비록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이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모두 그 배후에 사단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고 합니다. 결국 세상 현실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짐승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힘을 경배합니다. 힘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합니다. 단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예외입니다. 즉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사단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힘으로 살아가지 않고 힘을 추구하는 자로 살지 않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증인인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이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싸움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9절부터 보면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9-10)고 말합니다. 누구든 귀가 있거든 들으라는 것은 귀가 없는 자, 즉 귀가 열리지 않는 자는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가 열린 자는 성령 받은 자,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으로 선택된 자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만 오늘 이 말씀을 보고 듣고 이해가 되고 믿어지고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산다는 것입니까? 사로잡히고 칼에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로잡으러 왔을 때 그냥 사로 잡히셨습니다. 죽일 때 그냥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힘의 세상에서 사로잡히고 죽는 것은 분명히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일이 있을 때 큰 능력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더 신나는 일이지 사로잡는다고 사로잡히고, 죽인다고 죽는 것은 바보 같은 짓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계는 바로 그 바보 같은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세계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그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져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가 되어지고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어지는 이 일이 기적인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바보 같아 보이는 것이 성령이 함께한 자의 눈에는 정당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렇게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승리한 삶입니다.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 죽이면 죽고 조롱하면 조롱받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이 승리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 의해서 조롱을 받을지언정 우리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믿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아무런 효능이 없어 보일 때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흔들리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세상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조롱받고 무시 받음에 대한 원수 갚음은 예수님이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13:7)라고 합니다.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성도와 싸워 이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김이라는 것은 신자를 천국 못 가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서의 이김을 말합니다. 즉 성도는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이며, 눌림받는 자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에게 이기기 위해서 돈을 벌지 마시고, 남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힘을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사단의 방식입니다. 힘을 힘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나 또한 힘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힘을 하나님에게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성 모독하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단인 것입니다.

증인은 힘의 세상에서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힘 없어도 괜찮고 그것 때문에 무시당해도 괜찮습니다. '믿는데 왜 그런 꼴을 당하느냐'는 조롱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래 봐야 사단의 운명은 마흔두 달이기 때문입니다. 한시적이라는 것입니다. 마흔두 달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의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신자는 힘의 세상에서 힘으로 살지 않는 삶을 보여줘야 할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차면 예수님이 모든 것을 갚으실 것이라는 이 말씀이 성도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돈 벌어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출세해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자식 잘 키워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짐승의 나라일 뿐입니다. 신자는 다만 믿음이 귀한 줄 알고 믿음으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믿어서 어떻게 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서 흘리신 주님의 그 피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만 영원하고, 주님만 변함이 없고, 주님만 나와 함께 하시면 되는 것이지 돈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때까지 인내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배후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세상의 배후는 누구라 하며 또 그 배후를 의식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3. 눈에 보이는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와 현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사탄이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과 의식하는 자들의 삶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5. 오늘 본문에 요한을 통하여 보여주는 세상의 현실, 즉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6. 용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이 등장함으로 신앙도 어떻게 변질되었다고 합니까?

 

7. 짐승의 머리에 ‘신성모독’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8. 하나님을 반역한 사탄이 인간에게 하는 일은 무엇이고 또 그러한 모습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9. 짐승을 경배하는 자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의 삶이 어떻게 다릅니까?

 

10.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이기는 승리의 삶은 무엇이며 또 그런 신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이 세상을 신자의 역할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인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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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 2023 12월 3일 / 요한복음 23. (요 4:43-54)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자들 관리자 2023.12.03 9
696 2023 12월 3일 / 요한계시록 39. (계 11:3-6) 두 증인의 권 관리자 2023.12.03 9
695 2023 11월 26일 / 요한계시록 38. (계 11:1-2)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관리자 2023.11.26 14
694 2023 11월 19일 / 추수감사주일 / (출 23:14-17)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관리자 2023.11.19 13
693 2023 11월 12일 / 요한복음 22. (요 4:39-42) 우리가 친히 듣고 앎이라 관리자 2023.11.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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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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