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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본문 / 6: 1- 2

 

1. 표적

오늘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32)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들뿐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그 모든 표적을 모두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기록함으로서 신기한 이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인에게 소개하고 그러한 예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의 말씀 그대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요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적을 행하셨든 간에 이적은 이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취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표적은 결코 표적 자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표적은 표적 자체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주님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표적에 매료되고 도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표적을 단지 경이로운 능력으로만 여겼을 뿐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로 바라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2. 주를 따르는 이유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6:1-2)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 매료되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5)고 합니다. 이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목격한 뒤에는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해서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리의 이러한 모습이 곧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같아도 그 어떠한 병도 고치시는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분을 임금으로, 아니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대통령으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동일하겠지만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이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켜 세울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 경제가 어려운 나라일수록 그러한 시각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천 명이라는 무리가 겪고 있었던 배고픔을 일시에 해결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임금으로 삼는다면 배고픔의 문제만큼은 얼마든지 해결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바람이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피해버리십니다. 결국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한 것은 오직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계신 능력이 소중한 것이고 그 능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큰 무리가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른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생명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병자를 고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을 기대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되신 분임을 안다면 그런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의 본질은 예수님이 아니면 영원한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자가 예수님을 무작정 자신의 생명으로 믿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성경은 인간을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말합니다. 비록 세상은 이것을 무시하고 있고 또 영원한 사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 두려움 없이 살아간다고 해도 이런 세상이 세상이 믿든 또는 안 믿든 관계없이 인간의 운명은 비참이며 사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이미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은 사람입니다. 생명에서 단절된 자가 생명에 참여되었다는 놀라운 유익을 이미 얻었기에 또 다른 유익을 기대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누리는 생명의 귀함과 소중함의 가치를 모른다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기대하는 다른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나오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1-42)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표적으로부터 예수님 자신이 드러나기를 기대하시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이처럼 표적은 우리의 기대처럼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물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하기 위한 유익은 말할 수 있을지언정, 병이 낫고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유익을 위한 표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표적에서 보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유익이 아니라 육신적 차원의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도 자기 육신의 유익을 위한 의도였던 것입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성경에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의도에 전혀 부합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를 좇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병인들을 고치신 예수님을 따르고 추종하려는 경향이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보다는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에게 더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되심을 증거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유익 때문에 예수님을 좇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체험한 뒤 예수님을 좇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표적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본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배부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배부름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연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생명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부터 멀어질 수 없기에 예수님을 좇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진정한 행복자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보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비참함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아무것도 보지를 못한다면 우리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에 대해 긴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유익을 기대한다고 해도 그 역시 자기 신앙에 대해서 긴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의 의미는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 안에서만 식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표적은 결코 우리에게 주어질 육신의 유익을 말해주기 위함이 아님을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믿지 못할 이적을 행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해도 그 사건들을 우리 개인이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익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우리는 과연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3. 신자의 참된 관심

그런데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 이전에 과연 보는 것이 있기는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신 그리스도이든, 아니면 우리의 육신에 유익을 주는 그리스도이든 뭔가를 보고 예수님을 따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은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관심 또 하나는 잘못된 관심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참된 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생명이든 세상의 유익이든 전혀 관심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관심이 있다면 교회에 있을 뿐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잘못된 관심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서 자기 유익을 기대하는 관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참된 관심은 예수님에게서 오직 영원한 생명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모습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에만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채 다만 편안한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심이 항상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생각으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물론 병자가 낫거나 육체적인 만족이 우리에게는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지만 그 경우 예수님을 인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것은 우리들의 영적 필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영적 필요가 채워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인간의 육신의 만족이나 유익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오직 생명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 역시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운명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자연히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에 정해진 심판과 멸망을 보지 않는다면 자연히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보일리 만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다만 이적을 행하고 인간의 육신의 만족을 채워주는 예수일 뿐입니다.

믿음은 믿는 자들 안의 하나님의 일입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시는 일이 믿음입니다. 이 일을 예수 안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한다면 모든 일에서 자기만족과 유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빛이요 생명이기에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굳건히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의지하며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공급해주는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사망에 처한 자에게 유일한 희망인 생명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버리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에게서 그 희망을 보는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서 진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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