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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어린 양과 짐승의 이름

본문 / 14: 1- 5

 

1. 신자란

신자에게 있어 성경은 확신이어야 합니다. 신자는 성경을 진리로 알고 그래서 진리인 성경을 따라가는 사람이지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즉 자신의 느낌을 믿으려고 하지 않아야 하고 또 자신의 느낌에 흔들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이 확신이라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가지고 성경을 판단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느낌과 감정은 항상 성경에 대해 걸림돌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인간인 우리 자신의 느낌이고 감정인 것입니다. 성경에 충실한 것이 신자이지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신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느낌과 감정이 옳은 것이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느낌과 감정에 충실하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인간인 우리의 느낌과 감정은 절대 진리인 성경을 증명하고 확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느낌과 감정이란 인간의 기분에 의해서 언제나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느낌과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내 기분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이 돼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란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냥 믿는 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는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냥 믿고 순종했습니다. 노아가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경고를 믿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신자인 우리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경고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십니까? 그리고 그 약속에 순종하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느낌에 심판이 있을 것 같아서 믿으십니까?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을 가지고 아무리 세상을 둘러봐도 심판이 있다는 확신은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뜨거운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의 심판주로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 세상이 끝이 나는 날입니다. 세상은 그날까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잠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존재이지 세상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사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19:12-27)고 합니다.

우리가 므나의 비유로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길을 떠나는데 종들에게 각각 돈을 맡기고 그 돈으로 장사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어떻게 장사했는가를 살핍니다. 그 결과 돈을 그냥 수건에 싸두었던 종은 죽임을 당합니다. 만약 주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돈을 수건에 싸두든 땅에 파묻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반드시 돌아오신다면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종된 자는 주인이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를 항상 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는 이상 종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주인이 맡긴 일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천하에 가장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지 않으신다면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도 됩니다. 하나님을 버려도 되고, 예수님을 언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반드시 우리가 읽은 므나의 비유처럼 예수님이 맡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예수님이 오실 것에 대해서 어정쩡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으면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실까 안 오실까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자

오늘 본문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14:1)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앞에 계시록 13장에서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3:17)고 말씀한 것을 보면, 세상은 두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짐승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두 구조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이고,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입니까? 이것을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자와 다니지 않는 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이방 종교라는 식의 구분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어린양의 이름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교회 안에도 가라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짐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짐승이란 곧 세상의 권력자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짐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 짐승, 즉 권력의 도움이 있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가치 있고, 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모두 다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4절부터 보면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4:4-5)고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첫째,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순결한 자라고 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순결한 자라는 것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앞에서 말한 세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세상과 함께 하며 살아가는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와 같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부처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몸은 부처에게 절하지 않고 또 그런 곳을 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마음은 이미 그런 우상에게 가 있는 자들입니다. 실제 우상에게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우상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만들고 우상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에게 순종하고 따르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도움을 구하고자 우상을 만들고 찾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은 할 수 없으니 그것을 할만한 신을 만들어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우리가 우상에게 가지 않는다고 해도 우상을 찾는 사람들처럼 세상에서 나 잘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그 마음은 이미 우상 앞에 선 자들인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그 마음이 곧 우상숭배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순결한 자라고 할 수 있겠으며 또 누가 더럽히지 않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둘째,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간다는 것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되어진 모든 것이 곧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인도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버려지고, 나에게 득이 되는 쪽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쪽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이 바로 어린양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어린양이 내 인생에의 주관자로 또 왕으로 존재하시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산다면 세상의 힘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힘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어린양을 따라 가는데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처음 익은 열매로 여기서 말하는 처음 익은 열매란 '하나님의 장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 되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이 되어진 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장자' 또는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 되어졌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힘도 아니고, 모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입니다. 사람을 막론하고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은 모두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장자 재앙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애굽을 구분한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된 자는 몽땅 장자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살길은 오직 하나, 즉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산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처음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대속하심으로 살았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속하고 어린 양에게 속했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대속함을 입었기 때문에 산자가 되었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더러움을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감춘 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말이 진실이겠습니까?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자가 믿는다고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은 '나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아는 진실인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과 불의함 안에서 주님의 의로움을 아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 믿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하면 심판을 받아야만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주님이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산자가 되었습니다. 내 죄를 주님이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주님의 의가 주어진 것,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있는 자라면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제가 죽어야 할 죄인인데 이 죄를 주님이 담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내가 산 자가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바로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이 할 일을 내세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거짓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선을 행했으니까 나는 복 받을 만한 자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의를 생각하지 않게 합니다. 아예 의가 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의가 없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신 주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하는 새 노래는 바로 이런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3. 새 노래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14:3)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노래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노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경험이 있는 자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이들은 십사만 사천이며,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길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 길이 죽는 길이라고 해도 주님을 향한 믿음은 죽음조차도 기쁘게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새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 노래는 홍해를 가르는 경험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 있는 자의 노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산자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피가 나를 살렸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분리된 채 세상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러움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이들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 노래는 아무 누구나 부를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그들만이 성령을 통해서 새 노래를 배우고 부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새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지 말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주님의 피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서 짐승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아니면 어린양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짐승의 이름을 가졌다면 짐승의 이름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어린양의 이름을 가졌다면 어린양의 이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양의 피의 대속을 안다면 우리는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상 속에서도 오직 어린양의 피가 귀하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린양의 은혜일 것입니다. 세상 것은 다 잃어버려도 어린양의 대속의 은혜는 잃어버릴 수가 없다는 열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세상 것을 위해서 어린양의 대속의 은혜를 버리는 쪽으로 나아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이것은 느낌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고 감정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되어질 일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세상을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피 흘리신 그 의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과연 마음으로 아십니까? 나 같은 불의한 자의 죄를 대속해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마음 깊이 우리에게 다가오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에서 어린양을 드러내며 살아갈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진리를 따르는 신자가 성경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만약에 우리가 노아처럼 세상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또 그 경고가 믿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까?

 

3. 세상 모든 사람이 나누어져 있는 두 구조는 무엇과 무엇입니까?

 

4.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는 어떤 자들이라고 합니까?

 

5.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더럽지 않고 순결한 자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6.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사람들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라고 하는데 그런 자는 어떻게 구분되어 집니까?

 

8.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하나님과 어린 양께 속한 자들은 거짓말과 흠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거짓이 없는 자와 거짓 된 자의 모습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10.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새 노래의 내용은 무엇이며 또 누가 부를 수 있습니까?

 

11.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서 어떤 이름이 드러나고 있는지 점검하고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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