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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병이어의 표적

본문 / 6: 3-15

 

1. 말씀을 대하는 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기에 이 시간 여기에 와 있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교회를 다니는 삶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부터 스스로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아니면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알기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십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에 대한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러한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소중한 분으로 우리의 마음에 머물러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에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를 좇고 있는지 아니면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겼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살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믿었다고 생각되는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마다 항상 염려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대하기 전 이미 우리의 생각 가운데 어떤 결론이 내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생각으로 어떤 결론이 내려진 후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자신의 생각에 굳어져 있는 결론을 정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성경이 해석되고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 되어진 하늘의 진정한 뜻을 왜곡하고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 우리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자고 하지만 결국 또 내 생각에 의해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해 버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쉽게 발견합니다. 물론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 앞에서 바른 생각이라면 감사할 일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잘못된 것인데도 제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지 않기 위해 힘을 써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말씀에서 나의 입장이나 나의 생각을 옹호하고 변호하기 위한 결론을 만들어내지 않으려고 경계하고 조심해야만 합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 되어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여지는 말씀에 대해 바르게 깨닫기를 소원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대하는 하나님의 원하심이며 또 우리의 솔직한 기도여야만 합니다.

이런 말을 드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자기 생각을 신뢰하지 말자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신뢰해 버리면 모든 것을 자기 생각에 맞추어서 해석하게 됩니다. 말씀 역시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해 버립니다.

그럴 때 사람은 아무리 옳은 말이 들려진다고 해도 자기 생각에 틀린 것이면 결코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옳아도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오 하기 때문에 나 역시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라면 옳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 성경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커다란 함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자신감을 가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시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가까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대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이적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이 이적은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많이 들었던 말씀이기 때문에 혹 나름대로 이 이적의 의미에 대해서 이미도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우리가 이미도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오늘 나누는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뒤에 생명의 떡과 연관지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생명의 떡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보다는 본문의 말씀 안에서만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믿음 없는 인간의 실체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오늘 본문의 오병이어의 사건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 묻는 내용과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은 빌립에게 묻는 예수님의 말씀과 오병이어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임을 구체적으로 말함으로써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먼저 5절부터 보면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5-6)고 합니다. 예수님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오는 무리가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고 다만 병인들을 고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무엇으로 먹이겠는가는 말씀을 빌립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6절의 말씀대로 빌립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상황을 도구로 삼아서 빌립의 사고방식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립 한 사람의 잘못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빌립을 대표로 해서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밝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6:7)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빌립의 이 말이 잘못된 것으로 보여지십니까? 큰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들을 먹여야 할 문제에 대해서 묻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물음 앞에서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이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는 답을 할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빌립은 믿음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안된다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돈은 없어도 예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보일 수 있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까?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 어려움에는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우리에게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고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데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에게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꼬?’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빌립처럼 이 일이 해결되려면 돈이 얼마가 필요합니다라는 답보다는 예수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우리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단정을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속마음이 어떨까를 솔직하게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그 상황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남의 일입니다. 사람은 남의 일에 대해서는 한껏 마음의 여유를 가집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믿음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일로 다가왔을 때는 갖고 있던 여유는 사라지고 초조와 불안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의 상황을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지금 우리 자신의 일로 여기고 우리의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디서 떡을 사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라고 말씀하심으로 문제를 빌립과 상관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큰 무리를 먹어야 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들 수중에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계산합니다. 이러한 계산에 의해서 빌립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큰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없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빌립은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빌립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하면 된다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빌립에게 하면 된다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한 물음을 하신 것이라면, 굳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까지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 8절부터 보면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6:8-9)라고 말합니다.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가 무리 중에 섞여 있던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는 말을 함으로서 안드레 역시 빌립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자신이 소유한 것의 양을 가지고 일의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잘것없는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어린아이의 것이 없으면 이적을 행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는 질문을 하심으로써 빌립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는 어린아이의 것으로 이적을 베푸심으로써 무엇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기 육신의 문제에 국한 시켜 이해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잘것 없는 것으로도 큰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예수님에게 바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으로 큰일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이것이 육신의 문제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으로도 큰일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비록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작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면 예수님이 큰 것으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서 보여지는 현상 중에 하나가 예배당을 지을 때 가진 돈이 적다고 하더라도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또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자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신 예수님의 의도가 너희들이 가진 것이 적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시작해라. 그러면 내가 도와서 큰 것을 이루게 하리라는 인간적 욕망을 심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마음만 살아 있다면 그러한 해석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겨우 우리의 일을 성공시키고 크게 이루어주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이란 숫자에 비해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천 명이란 수도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안드레가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인 것입니다. 수천 명이 배고픈 현실에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은 결코 대접받을 수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그것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는 말씀을 합니다. 53절부터도 보면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3-55)는 말씀을 합니다.

이 모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과연 우리가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산다는 것에 대해 어떤 마음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 보다는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에게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영생의 문제보다는 눈앞에 일어난 상황에 더 마음졸이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삶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또 빌립은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봤습니다. 빌립에게 필요한 것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지 결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서 배부르게 하려면 예수님의 살과 피 보다는 돈이 필요한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돈이 필요한 현실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치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을 하찮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서 세상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는 세상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많이 말합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의 사건을 입에 달고 말하고, 마치 십자가가 우리의 전부이고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떠들지만 정작 현실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십자가는 사라지고 빌립처럼 문제 해결에 필요한 것이 수중에 없는 것으로 인해 낙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한 현실에서 아이에게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안드레처럼 우리 역시 현실에서 일어난 문제 해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되니까 결국 있으나 마나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속마음에 빌립과 안드레의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무시하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사람을 배부르게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장차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지만 세상은 그것을 하찮게 여길 것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가는 것만이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에 주리고 세상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고 다시 사심이 철저히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을 하지만 세상의 현실을 보고 그 해결에 급급해할 때 십자가의 은혜는 무시되고 반면에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능력의 예수일 것입니다. 오병이어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예수를 따릅니다. 자기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를 만나려 하고, 예수를 임금 삼으려 하고, 예수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십니다. 26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는 말씀을 하시면서 결코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으며 또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고치신 예수를 따르는 수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충성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며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이 믿음이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믿음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면서 단지 열심히 한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믿었고 사랑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원은 그와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유월절과 어린양의 가치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6:4)는 말씀을 합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가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음을 말합니다. 여기 마침이라는 것은 유월절과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무관하지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장자 재앙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인해서 살게 되고 애굽 나온 것을 기념하는 것임을 잘 알 것입니다. 장자 재앙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살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든 애굽이든 구분 없이 오직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만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이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나에게는 곧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생명이 되심을 알고 감사한다면 그가 바로 유월절을 지키는 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서, 다만 눈앞에 보이는 세상 현실만을 본다면 어린양의 피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돈이 필요하고 돈이 소중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는 과연 어떤 현실을 보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만을 본다면 우리는 언제나 돈을 필요로 하는 인생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고 그냥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렇게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열심히 외치는 자가 인간들일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고 주차장을 만들고 교육관을 짓는데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병자를 고치시고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그것도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27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것을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돈도 또 병자를 고치는 능력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 인생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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